[미디어파인=이성우의 세계와 우리] 우리나라의 경우,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따른 선거민주주의가 정착하고 30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선거가 끝나면 그 결과를 두고 예외 없이 언론에서는 “유권자들의 뜻은 현명했다” 또는 “민심은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는 식의 평가를 내놓았다. 민주주의 자체가 다수유권자의 결정에 따라서 정부를 구성하는 정치원리인 만큼 여론의 결정에 승복하는 모습이 다음 선거에서 승리의 기대를 높이는 합리적 선택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의 결과가 국민의 선택이라고 해서 항상 최선이 아니고, 대부분의 경우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에 근거한 집단적인 의사결정과정인 투표를 통해 위험한 선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위험한 선택은 위험한 결과로 이어지고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는 데는 많은 정치적 경제적 비용이 따른다는 점에서 엘리트 민주주의의 비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통선거제도에 기초한 대중민주주의에서 여론의 정서적 비논리성, 비일관성, 비도덕성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무비판적인 동조와 같은 중우정치와 선동정치의 위험성이 있지만 이를 바로 잡는 것도 결국 유권자의 몫이다.

한국의 주변국관계에 긴밀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서 유권자들이 그들의 지도자에 대한 정치적 선택이 중우정치의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미국이 민주주의적 정치체제라는 점에는 의심이 없지만 국민의 자유로운 선거에서 선출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주류를 이루는 백인 중산층의 욕심을 반영하는 비도덕적이고 정서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당시 러시아의 선거개입과 관련된 스캔들에 대한 수사를 피하려는 사법방해 혐의를 받고 있다. 최근의 미국 발 무역전쟁은 올 11월에 예정된 중간선거와 2년 후의 재선을 염두에 두고 전통적 지지세력인 러스트 벨트지역의 블루칼라 중산층 유권자를 위한 국내정치용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국제정치학계의 관심전환이론이 주장하듯이 국내정치에서 여론의 비판을 회피하고 지지세력을 동원하려는 분쟁유발행위다. 군사적 분쟁이 부담이 큰 만큼 무역분쟁을 통해 국내 유권자를 단합시키고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공산당이 집권한 이래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해왔지만 1인 우상화나 세습이 아닌 지도부의 정치권력에 교체가 주기적으로 가능했다는 점에서 개혁개방이후 장쩌민과 후진타오, 그리고 시진핑으로 이어지는 권력교체가 로마시대의 귀족정(aristocarcy) 또는 과두정(oligarchy)의 형태였다. 새 지도자가 차기 지도부를 구성할 때 차차기 지도자까지 자동적으로 포함시킴으로써 차기 정권의 실세들이 독주할 수 없도록 견제장치를 갖추는 나름대로의 엘리트 민주주의가 작동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최근 중국의 국가권력은 19기 2중 전회에서 헌법 개정안 논의를 거쳐 2018년 3월 전인대에서 '국가주석 2연임 이상 제한' 조항을 삭제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장기 집권을 사실상 가능하게 하는 중국 헌법 개정안을 내놨다. 중국 주요 관영언론 매체들은 사회주의 현대화 대국이라는 중국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앙 집중적이고 통합된 리더십이 필요하며 분권화된 리더십은 위대한 목표 실현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시진핑 장기집권의 제도화를 지지하고 나섰다. 중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강대국의 명분아래 장기집권과 국가주의의 정당화를 위해 위험한 선택을 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의 사례는 강대국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역사적 회한을 보여주는 노골적인 사례다. 푸틴 대통령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2대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후임으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을 4년간 수행하는 동안 총리직을 맡았다가 2012년 4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제 다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러시아 국영 여론조사기관 브치옴(VTSIOM)이 3월 1일 공개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69%는 3월 18일 대선에서 푸틴 대통령을 뽑겠다고 답했다고 타스통신이 보도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푸틴 대통령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뒤집고 싶은 역사’로 소련 붕괴를 언급하면서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 남아있는 세계 초강대국으로서 소련의 향수를 자극하는 애국심 마케팅에 주력하고 있다. 외신들은 푸틴의 선거 전략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그럴수록 러시아 내 여론의 지지는 확대되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해 푸틴은 의회 국정연설을 통해 러시아는 차세대 대륙간 탄도탄인 ICBM RS28 사르마트, 핵추진 엔진을 장착한 순항 핵미사일, 무인 수중드론과 같은 첨단무기를 언급하면서 다시 미국에 필적하는 강대국의 면모를 갖춘 러시아를 언급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제 예전의 러시아가 아니며 “그동안 아무도 러시아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들어야 할 때입니다”라고 러시아의 복권을 선언했다. 푸틴 대통령의 이러한 신무기 개발 선언으로 시리아와 크림반도 등의 분쟁에서 러시아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적어도 러시아 유권자들 사이에는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의 아베 수상도 일본 유권자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우경화를 통해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적 지지를 동원하고 있다.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2017년 3월 총재 임기를 현행 ‘2기 연속 6년’에서 ‘3기 연속 9년’으로 연장하는 당칙 개정을 결정하여 아베 총리의 9년 장기집권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 아베 총리는 중의원과 참의원 내 헌법 개정을 위한 국회 발의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 의석을 확보한 현 시점을 헌법 개정의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있다. 전쟁 포기를 담고 있는 헌법 9조 개정엔 일본 국민 절반 이상이 반대하지만 높은 지지율과 의석수를 기반으로 국민을 설득해간다는 것이다. 아베 수상은 방위비를 국내총생산의 1% 이내로 억제할 생각이 없다며 2017년 방위예산도 사상최대인 5조 1251억 엔을 편성하여 군비확장을 통한 군사대국화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아베의 군사대국화와 보통국가화라는 우경화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아베가 잘해서가 아니라 아베 총리 이외에 아무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아베가 총리가 계속 총리직을 수행하게 된다는 일본의 유권자들의 설명에 잘 나타난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는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 대외적인 분쟁에 참여함으로써 국내정치적 지지를 동원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관심전환이론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같은 논리적 연장선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는 다른 민주주의 국가와 전쟁을 수행할 가능성이 높지 않는다는 민주주의 평화이론에 중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현재 국제관계의 전개에 대한 이론적 해석은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는 정치권력의 연장을 위해서 국가주의에 기초한 정치적 지지를 동원하는 과정에 군비경쟁, 보호무역, 국수주의와 같은 폐쇄적 대외정책을 활용하려는 경향이 일반화 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4강의 국내정치가 국가주의(nationalism)를 앞세우는 강력한 지도자가 여론의 지지를 얻고 이를 통해 장기집권을 이어가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모두 강대국의 영광을 위해 강력한 군사력, 국부 유출을 방지하는 보호무역, 타민족과 국가에 대한 배타적 폐쇄주의와 대결과 갈등을 부추기면서 신뢰와 협력의 기반을 축소하고 있다. 미국의 압도적 우위의 국력으로 유지되던 기존의 국제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경쟁국으로 간주되었던 중국과 러시아는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미국이 군비경쟁과 보호무역을 시작하면 중국과 러시아가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비현대화와 무역전쟁을 추진하고 일본은 다시 여기 대응하는 형식으로 동아시아의 위험한 군사화와 보호무역의 경주가 지속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국내정치의 흐름을 전환할만한 동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러한 위기상황을 해결할 열쇠는 미국 유권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미국이 폐쇄주의, 민족주의, 보호무역주의라는 낡은 가치를 버리고 국제주의, 개방주의, 자유무역, 평화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선택을 통해 인류보편의 가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치적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대량살상무기는 더 이상 기술혁신 없이도 지구를 완전히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이고 보호무역은 결국 누구의 이익도 없는 무의미한 소모전이라는 사실은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강대국의 정치적 결정과정에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여론의 이기적 동기를 차단하고 인류보편의 가치로 돌아가는 노력에 미국의 유권자들이 앞장서야 한다.

▲ 이성우 박사

[이성우 박사]
University of North Texas
Ph. D International relations
현) 제주평화연구원 연구위원, 정치학 박사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