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예전에 한 케이블 방송에서 ‘철없는 아내’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집안 일에 전혀 손을 대지 않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간단한 청소와 빨래도 하지 않았고 하루 세끼를 배달 음식이나 외식으로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집안 일은 모두 남편의 몫이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돌아와서 아무 불평 없이 밀린 집안일을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방송을 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사람과 살 수 있느냐?” 며 그 남편을 안 쓰러워 하는 한편 주부로서의 책임을 외면한 그녀를 비난 했습니다.

그런데 한 방청객 중 한 여성이 그를 보고 “꼭 우리 남편 같네!”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처럼 살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그토록 경악스럽게 보였던 것은 결혼한 여자라면 집안 일을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아내에게도 당신만큼 주방이 낯설다. 저는 맞벌이 부부로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결혼하기 전 아내는 “반찬은 잘 못하지만 밥은 잘 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저는 당시 그 말을 자신의 요리 솜씨가 썩 좋지는 않다는 것을 상당히 겸손하게 말하는 것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제 어머니는 아들만 다섯인 데다가, 한동안 네댓 명의 하숙생까지 혼자서 거뜬히 감당했었기 때문에, 저는 여자라면 당연히 집안 일을 (더구나 단 둘이 사는 살림이니까) 잘 해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제 아내는 정말 밥만 할 줄 알았습니다. 처음 며칠은 친정에서 가져온 반찬으로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얼마 뒤부터 요리 책을 보며 공부하기도 하고 친정어머니에게 전화하여 코치도 받으며 반찬 하나를 겨우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도 직장에서 퇴근하고 난 후에 준비를 시작했으니, 그 음식이 만들어질 동안에 저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다른 것들을 찾아서 먹곤 했습니다. 그러니 정작 아내가 만들어 낸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내는 애써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지 않는다며 서운해 했지만, 저는 속으로 ‘당신이 부엌일에 서툴러서 그런 거니까 내 잘못이 아니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말을 직접 대놓고 하지는 않았지만, 몇 시에 귀가한다고 전화까지 해주었는데 식사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리게 한 아내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무튼 아내가 결혼한 후에야 집안일을 배우기 시작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좀더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 있는데, 그 첫째는 여자라고 해서 당연히 집안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더라는 점이고, 둘째는 그래도 책을 찾아보기도 하고 시장 아주머니들에게 배워가며 나름대로 애를 쓰더니 정말로 주부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표현을 빌자면, 아내가 ‘주부로 만들어지는' 것을 바로 곁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딸들이 어렸을 때부터 집안 일을 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니까, 살림 공부를 미리부터 했던 셈입니다. 그러나 아들딸 구별 없이 공부 잘하는 것을 최고로 삼는 요즘은, 딸이라고 집안 일을 맡기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결혼하면 실컷 할 텐데 지금부터 할 필요없다”며 부엌에서 딸을 쫓아내는 부모들도 많습니다.

제 아내도 그런 때문이었는지 결혼 전까지 집안일을 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결혼할 때까지 손수 만들어 먹어본 음식이라고는 라면이나 계란 프라이 정도가 전부였고, 세탁기 빨래조차 서툴렀습니다. 집안 일에 있어서는 (적어도 그 당시에는) 저보다 잘 하는 점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내도 처부모에게는 소중한 딸이었고, 결혼하기 전까지는 저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보살핌과 도움을 받으며 지냈던 것입니다. ​이런 점을 깨닫고 나니, 그 동안 아내의 느린 음식 준비나 서툰 살림을 한심하게 여겼던 것이 미안해졌습니다.

제가 자란 가정에서 어머니가 유일한 여성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의 부엌일을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 할머니, 즉 어머니의 시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불알 떨어진다.”고요. 물론 농담 삼아서 하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고 ‘아내의 집안 일’을 돕기 시작하면서, 할머니 세대에서 정작 염려했던 점은 남자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즉 여자를 포함하여 ‘보잘것없는 아랫것들이나 부엌을 들락거리는 것이다‘라는 남성 중심의 권위적인 행태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남녀차별적이고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편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 남편들에게는 다음의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아내가 어떤 남편의 권위를 인정, 즉 존경하는지 아십니까?

혹시 아내가 어려워하고 멀리하는 것을 남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또는 비싸고 귀한 것으로 호강시켜주면 남편의 권위를 지킬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특별한 경험을 마다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런 것으로 아내에게서 존경을 얻을 수는없습니다.

권위나 존경은 얻고자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질수록 얻게 되는 것이라는 말은 워낙 흔한 말이라서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의 가정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존경을 얻으려면 먼저 낮아져야 합니다. 그러면 부부 간에 낮아지는 것은 어떤 자세일까요? 쉽게 말해서 상대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상대가 귀찮아하는 것을 조금이라고 덜어주기 위해서 내가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돈을 벌어오는 것, 자질구레한 집안 일 처리, 그리고 말 안 듣는 자녀들을 잘 타이르기등입니다.

집 밖에서 아무리 잘 나가든 또는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이든 관계 없이, 이런 마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남편은 그 아내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 역시 그런 부모님을 존경하며 자신들도 그렇게 살려고 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가정의 많은 문제점들이 반드시 남편이나 아버지의 잘못 때문은 아니지만, 그 해결을 위해서는 권위와 존경울 얻으려 하기 보다는 충분히 낮아지려는 태도가 더 필요합니다.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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