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저는 (예전보다는) 아주 약간이나마 집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제게 집안 일을 해달라고 요구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아내의일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순전히 저 자신을 위한 동기였습니다. 신혼 초, 주말이면 저는 아내 에게 친구들 만나러 가자, 볼링 치러 가자, 영화 보러 가자 등등 같이 놀아달라고 무척 졸랐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할 일이 밀렸다거나 피곤해서 자야겠다는 이유로 제 제안을 종 종 거절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그런 아내를 두고 친구와 약속을 만들어 나가거나, 아내가 설거지를 마치기를 기다리며 TV를 보다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자기만 바쁘나? 나도 할 일도 많고 바쁘지만, 같이 잘 지내려고 이러는 건데, 자기 생각만 하나?’ 라고 생각하며 삐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계속 지내다가는 제가 애초에 원했던 대로 아내와 재미있게 살기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아내 역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퇴근 후에는 저보다 월등히 많은 일을 하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저와 놀기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밀린 집안 일을 하느라 집에서도 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깨닫고 나서 저는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면 아내가 거절할만한 이유를 줄여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집안 일 정도는 아내의 손을 덜어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남녀평등 의식이나 아내를 위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제 필요 때문에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자랑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때 제가 그런 판단을 한 건 참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계속 삐쳐 있었거나 아내와 함께 시간 보내기를 아예 포기하고 가정 밖에서 재미를 찾았더라면, 저희 부부 사이가 얼마나 나빠졌을지 뻔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니까 말입니다.가끔 제가 설거지나 청소를 할 때 아내는 TV 드라마를 보거나 먼저 잠자리에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솔직히 (뭔가 손해 보는듯한 느낌 때문에) 약간 약이 오른 적도 있습니다만, 거꾸로 아내가 집안 일을 하는 대부분의 시간에제가 뭘 하고 있었던가를 생각해보면 서로 비교할 정도가 아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내가 늘 해오던 많은 집안 일들 중 일부만을 거들면서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냥 생색을 내고 싶은 제 얄팍한 심리가 부끄러워집니다. 내가 약간 수고함으로 아내가 편히 쉴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하는 건데 말이지요. 또 어떤 여성들은 제가 사용하는 ‘도움’이라는 표현이 거슬릴 것입니다. 공동 생활인 집안 일이니까 아내를 돕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아직 ‘아내의 일을 돕는’정도도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제가 드리는 말씀은, 저의 성공담이나 모범을 보이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저는 그야말로 ‘운 좋게’ 집안 일도 제가 져야 하는 책임들 중의 일부분임을 깨닫게 되었다는말입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음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자라면서 어머니가 집안 일로 분주하신 것을 보면서도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식들이 공부할 시간을 빼앗는다고 생각하셨는지어머니께서 그런 요청을 하시지도 않았고, 그 때만 해도 남자가 부엌 일을 한다는 것을 거의 볼 수가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자인 제 아내조차도 집안 일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하고 한 동안힘들어 했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이 집안 일을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아들이든 딸이든 어려서부터 집안 일에 책임을 나누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부모가 가사 분담에 모범을 보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겠지요. 집안 일은 대부분 귀찮고 생색내기도 어려운 일들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처럼 귀찮아 보이고 반복적인 일상적 활동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부부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 후의 사랑은, 연애 때와는 다른 거라서, 일상 생활에서 확인되는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많은 돈을 벌어다 주는 것으로 남편의 역할을 내세우는 남자들이나, 요일 별로 각자 할 일을 나누느라 다투며 사는 소위 ‘현대 서양식 부부’ 모두 바람직한 사랑의 모습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비록 아내가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지 않았더라도 혹은 남편이 널어놓기로 한 세탁물이 세탁기에 남아 있더라도, 그것으로 상대의 사랑을 판단하지 말기를 권합니다.

제가 부부가족치료사로서 당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오히려 당신들의 사랑이 그런 가사 분담 정도로 재단할 수 없을 만큼 더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기를 힘쓰십시오. 당신들의 그런 사랑은 집안 일 분담에 성의를 보이는 남편의 노력과 그런 남편의 수고에 감사하는 아내의 모습을통해서 매일매일 확인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집안 일 그리고 남편의 가사분담은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즉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또는 상대가 하지 않으니 내가 억지로떠맡아야 하는, 결혼이라는 계약이나 사회문화적인 압력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짐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사랑을 간직하고 확인할 수 있는 귀한 기회로 여겨질 것입니다.

사회적인 성공이나 개인적인 매력을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행복한 가정 생활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경우들도 적지 않습니다. 당신과 당신들의 자녀가 살아가는 가정을 행복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 자신보다상대가 기뻐하는 것을 실천하려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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