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위해] 굳이 좋아하는 동물을 고르라면 필자는 단연코 돼지를 꼽는다. 생김이 귀엽거나 맛이 있어서도 아니고 필자처럼 다리가 짧아서도 아니다. 부모와 오 남매를 포함한 필자의 일곱 식구가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의 중심에 돼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필자의 부모가 축산업 등 거창한 업종에 종사한 것은 아니다.

필자의 모친이 돼지 부속 따위를 재료로 하는 순댓국 장사를 했을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북이 고향인 부부는 지긋지긋한 북한 땅을 많이 넘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게 겨우 철원이다. 참 많이 넘었네요. 살면서 필자는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부모가 부산까지 갔더라면 국제시장에 터를 잡았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젊은 남녀는 38선을 넘어 몇십 리를 더 왔을 뿐이며 쉬어가려고 한 곳에서 필자를 포함한 오 남매를 낳고 평생을 살았다. 농담을 좋아하는 필자가 너무 오래 쉬는 것 아니냐고 농을 던지면 부부는 박장대소를 하곤 했다. 가진 것 없이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남, 녀가 자식 다섯을 키워야 했으니 고생이 오죽했겠는가. 농담이 아니면 웃을 일조차 없는 힘든 삶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리어카로 고물을 모으고 엄마는 순대를 만들어 좌판에서 팔았다. 흙벽돌로 지은 집은 겨울이 되면 틈새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일 정도로 벽이 갈라지곤 했다. 칼바람이 부는 철원의 겨울은 혹독하게 춥다. 아버지는 갈라진 틈새를 신문지로 틀어막았는데 외부에서 신문 일부가 작은 나비처럼 펄럭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순대를 만들게 된 것은 가장이 주워오는 파지나 탄피, 전깃줄 등으로는 일곱 식구의 호구지책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 남매를 둔 스물여덟의 여성이 왜 하필 “고기를 담은 작은 자루”라는 뜻의 만주어인 순타를 만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후 젊은 여성은 耳順(이순)의 나이가 될 때까지 돼지 창자와 선지로 순대를 만들어 팔며 오남매를 키우는 힘든 삶을 살게 된다. 어머니의 손은 항상 돼지기름으로 번들거렸는데 큰아들 놈은 자신을 만지려는 엄마의 손을 피하곤 했다. 돼지기름이 얼굴에 묻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손은 싫었지만, 그 손으로 만든 순대 만큼은 환장하고 먹었다.

어머니가 김이 오르는 순대를 길게 잘라 주면 필자는 김밥 베어 먹듯 먹어 치우곤 했다. 지금은 순대를 동그랗게 썰지만, 그 당시는 어슷하게 썰어냈는데 사람들은 줄을 서서 순대를 먹었고 엄마는 부지런히 기름 묻은 돈을 앞치마에 담았다.

국민 간식으로 대표되는 떡볶이와 달리 순대를 일반인이 만들어 먹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재료의 특성과 더불어 만드는 과정 또한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순대의 원재료를 동네 푸줏간에서 받아오는데 비싸지는 않았던 기억이 난다.

칼로 썰기만 하면 바로 구워 먹을 수 있는 고기와 달리 내장이나 머리 등은 특별한 손질이 필요하다. 보통 한 마리의 머리와 창자, 허파, 간 등이 세트로 끈에 묶여 있는데 큰 함지박에 몇 마리 분량이 담겨있곤 했다. 지나던 사람들은 핏물에 담긴 내장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하는데 비위 약한 여성들은 구역질을 하기도 한다.

거친 북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어머니는 나중에 맛있게 먹을 그들을 보며 비웃듯 말했다. “너희가 아직 창세기 안을 못 봐서 그러는구먼.” 느닷없이 죽어간 돼지가 관장이라도 했겠는가. 우리가 좋아하는 순대의 주재료인 창자 안에는 돼지가 남긴 삶의 흔적이 오롯이 담겨있다.

편육이나 순대, 또는 순댓국을 즐기는 독자분들께는 필자의 리얼한 레시피들은 다소 충격적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살아 숨 쉬며 먹이를 먹던 동물이 불과 몇 시간 후에는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그 과정이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돼지 내장 손질은 힘들고 지루한 작업이다. 그것을 지켜보던 어린 필자의 눈앞에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왕소금으로 닦기 위해 뒤집은 창자 안에 무언가 있다는 거다.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