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최기호 교수의 세종대왕 이야기]

▲ 김학수 화백의 세종대왕 영정, 세종대왕기념관 소장

1. 세종대왕 등극 600돌을 기림

세종대왕은 1397년 5월 15일(음4.10)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인왕산 기슭 경복궁 영추문밖 한양 준수방  잠저(潛邸)에서 태어났다. 잠저(潛邸)는 나라를 처음으로 이룩한 임금이나 종실(宗室)에서 들어와 된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나 또는 그 동안에 살던 집을 이르는 말이다.

세종대왕은 1418년 9월 9일(음 8.10)에 22세의 나이에 조선 제4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재위기간은 1418년부터 1450년까지 32년간이었다. 금년 2018년은 세종대왕이 즉위한지 600돌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세종대왕은 여러 방면에서 훌륭한 치적을 쌓았으며,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세종대왕은 세계에서 제일 가는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으며 그 외에 과학기술, 음악, 국방, 외교, 농경, 천문, 문화, 한의학, 사회복지 등 각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겨레의 큰 스승이신 세종대왕 나신 날, 5월 15일을 우리는‘스승의 날’로 정하여 기리고 있는 것이다.

2.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세종대왕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1423년(세종 5) 7월 3일

▲ 멋글씨; 서예가 강병인

세종대왕은“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이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하였다. <세종실록> 1444년(세종 26) 윤7월 24일.

모든 일에는 근본이 중요하다. 나라도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세종대왕은 나라의 근본은 임금이나 정승이 아니고 백성이 근본이라고 하였다. 비록 노비라 할지라도 소중한 나라의 근본이라고 하였고, 모든 백성을 위하여 정치를 하였다. 

“나라의 바탕을 견고하게 한다면,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예의를 지켜 서로 겸양하는 풍속이 일어나서, 태평시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 세종대왕의 생각이었다. <세종실록> 1444년(세종 26) 윤7월 25일

3. 세종대왕의 경청 리더십

지도자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경청(傾聽) 은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경청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동기를 이해하는 상호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세종대왕이 즉위한 후에 제일 먼저 한 말이“토론 해 보자.”였다고 한다. 신하들에게 나라에 도움이 되는 말을 무엇이든지 말해달라고 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세종대왕은 22살에 즉위하고, 나이 많은 신하들에게 “경들과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려 한다.”고 하여 신하의 의견을 경청하였다. 세종대왕은 진심으로 백성을 나라의 뿌리로 생각했고, 그들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신하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이를 국정에 반영하였다.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여 거느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들이 부지런히 농사에 종사 하여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1444년(세종 26) 윤7월 25일

4. 세종대왕 때 직간 잘 하는 3대 쓴 소리 

집현전은 학술기관으로서 세종대왕의 집중적인 인재양성과 문풍 진작을 위한 문화진흥 정책에 힘입어 훌륭한 학자가 특히 많이 배출 되었다.

집현전관 업무는 경연관, 서연관을 비롯하여 고제(古制) 연구, 외교문서 작성, 편찬사업, 풍수학관, 언관(言官), 등 여러 기능을 수행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은 세종대왕의 측근으로서 국방,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 대하여 자문하며 직간(直諫)하였다.

그래서 세종대왕 때에는 많은 인제가 나왔는데 황희와 맹사성 같은 정승과 장영실, 이천 같은 과학기술자와 최윤덕, 김종서, 이종무, 최산해 같은 국방전문가와 박연 같은 음악가도 있었다.

특히 부제학 최만리(崔萬理)와 이조판서 허조(許稠)와 사간원 고약해(高若海) 등은 강직하고 직간을 잘하는 3대 쓴 소리도 있었다.

“모든 관리들은 제각기 힘써 백성들에게 이롭고 병 되는 것을 거리낌 없이 직언(直言)하여, 짐이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지극한 생각에 부응되게 하라.”<세종실록> 1423년(세종 5) 4월 25일 

▲ 세종대왕 즉위 500돌 문화제 국민위원회

세종대왕은 이렇게직간(直諫)하는 것을 장려하고, 수용하여 직간하는 신하들도 포용하였다.

집현전의 총책임자인 부제학 최만리는 세종대왕에게 14번의 반대상소를 올린 올곧은 청백리였다. 척불상소(7회), 사직상소(1회), 석류황사건상소(1회), 이정분권 반대상소(3회), 이적(李迹)재심상소(1회), 운서언해반대 갑자상소(1회) 등이었다.

1443년(25년) 계해년 겨울(冬)에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는데 이듬해인 1444(갑자)년 2월 16일에 운서언해를 시작하여 2월 20일에 반대갑자상소를 올렸다. 이것을 ‘한글창제 반대상소’라고 잘못 말한 것이다.

오히려 최만리는 강직한 부제학으로서 갑자상소 첫머리에 “한글을 창제한 왕의 업적이 지극히 신묘해 사리를 밝히고 지혜를 나타내심이 천고에 뛰어난 업적”이라고 극찬하였다.

허조는 꼬장꼬장하기로 악명이 높은 청백리 선비였다. 토론을 하면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게 없이 깐깐한 이조판서였다. 조말생의 거액뇌물 사건이 터지자 세종대왕은 파직하는 것으로 사건을 맺으려 하였다. 허조는 세종대왕에 맞서 조말생의 처형을 강력히 직간하였다.

불교 행사에 밀랍으로 만든 초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세종대왕이 ‘선대로부터 내려온 유풍’이라고 주저하자 고약해(高若海)는 “옳은 도리가 아니면 빨리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우리말에 “그 사람 성질이 고약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고약해 사간원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함부로 말하는 고약해 같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부제학 최만리를 26년간 집현전에서 가까이 두었고, 허조는 이조판서를 시켰으며 고약해는 대사헌까지 벼슬을 주며 쓴 소리를 귀담아 들었고 포용하였다.

세종대왕은 시골 농부의 말도 귀담아 들으라고 하였다.

“비록 꼴 베는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들어서 말한 바가 옳으면 채택하고 비록 맞지 않더라도 아래 사람의 사정을 알아서 자신의 총명을 넓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1433년(세종 15) 7월 27일

세종대왕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 하는 사람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하고 깊이 생각하여 추진하였다.

세종대왕은 지극한 애민사상과 탁월한 통치력(리더십)으로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렸다. 신분의 귀천이나 빈부, 남녀, 노소의 구별 없이 온 백성을 귀하게 여겨 겨레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성왕이다. 

▲ 문학박사 최기호 교수(세종대왕 즉위 600돌 문화제 공동대표)

[문학박사 최기호 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울란바타르대학교 전 총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상무이사, 외솔회 회장
한국방송심의위원회 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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