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초 태백산 장군봉 천제단 중 천왕단이 크게 훼손된 모습. 태백시와 관련기관이 합동으로 진상조사를 벌이고 있다. 천제단은 과거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국가의 제를 지내는 곳이었다.

[미디어파인=정동근의 명리학 산책] 필자는 지난 3월 초 태백산 천제단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다녀왔다. 천제단 중 천왕당 한쪽이 심각하게 허물어진 천제단을 보고 크게 놀랐다. 다행이 강원도 문화재수리담당, 태백시, 태백경찰서, 태백산국립공원사무소 등이 합동으로 현장조사에 나선다고 했다니 결과를 두고 볼 일이다. 이번 조사는 제단 붕괴원인을 밝히기 위함이다.

태백산 정상에 위치한 천제단은 천왕단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단, 남쪽에는 그보다 작은 하단의 3기로 구성 돼 있다. 천왕단은 자연석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3m, 좌우폭 7.76m, 전후폭 8.26m의 타원형이며, 녹니편마암의 자연석으로 쌓아져 있는데 윗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사각형이다. 이러한 모양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 때문이다.

천제단은 과거 몇 차례 무너지는 수난을 겪었다. 자연적으로 무너진 경우도 있지만 종교적 문제로 훼손된 적도 있어 철저한 조사가 요구된다. 국가 기도를 하던 곳이란 점에서 국운과도 무관하지 않다. 태백산 천제단 역사와 국운에 대해 써본다.

태백산은 <삼국사기>에 기록이 나오는 민족 명산이다. 강원도 삼척과 경북 북부지방에 걸쳐 있다. 조선 후기 역사학자인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고구려의 잔여 백성이 북쪽 태백산 아래에 의거하며 국호를 발해(渤海)라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을 가리킨 것으로 단군왕검이 하강 하였다는 지역이다’라고 적고 있다.

태백산을 한글로 풀면 ‘크게 밝은 뫼’이며 이는 ‘한밝달’ 또는 ‘한배달’로 변화하면서 단군신화와 연관이 있다. 상고대의 역사를 거론하는 문헌에서는 태백산을 백두산과 통용해 불렀고 고대 이후의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는 태백산을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북도에 걸쳐있는 산에 국한해 말하고 있다.

▲ 천제단은 상고시대부터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으로 단군조선시대에는 남태백산으로 국가에서 치제했고, 삼한시대에는 천군이 주재하며 천제를 올렸다. 신라 때까지 임금이 친히 천제를 지냈고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방백수령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다. 지금은 개천절에 이곳에서 제사를 받드는데 중앙에 태극기와 칠성기를 꽂고 주변에는 33천기와 28수기를 세우며 9종류의 제물을 갖춘다.

민족의 명산 천제단 훼손…철저한 조사·원인 규명 필요

후자의 경우 태백산이란 이름이 붙은 연유에 대해 허목은 <척주지>에서 태백산은 현재 천제단(天祭壇)이 있는 봉우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문수봉과 함백산과 창옥산 등을 모두 포함하는 권역으로 멀리서 바라보면 문수봉에 쌓여있는 돌덩어리로 인해 마치 흰 눈이 쌓여 있는 것 같아 태백산으로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태백산 제천단의 천제는 신라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행사로나 지방기관이 주관하거나 마을단위나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신라 학자 박제상이 저술한 것으로 전하는 상고사 비서(秘書) <부도지>에는 신라초기에 박혁거세 임금이 태백산아래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했고 태백산 가운데 봉우리에 있던 허물어진 천제단을 수축하고 제사했다고 전해진다. 신라가 당나라 연호를 사용한 뒤 제후국으로 강등되어 제천 행사를 공식적으로 하지 못했으나 은밀하게 또는 민간 차원의 제천은 계속된 듯하다고 <증보문헌비고>는 기록하고 있다.

태백산에 기도를 올리는 제향(祭享)의식은 삼국사기,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삼척읍지 등 여러 문헌에 실려 있다. 천제단의 천제와 함께 조선시대에도 일반 백성들에 의해 공공연히 이뤄져 온 태백산 산신에 대한 의례도 있다. 태백산 천제는 조선시대 말기에 중단된 이후 무속과 현지주민들에 의해서 계승되어 오다가 광복을 전후해서 민족 종교인들이 태백산을 단군성지로 여겨 제사를 모시게 됐다.

구한말에 나철(1863~1916)이 단군을 교조로 한 대종교를 창시하면서 천제단을 보수했다. 이어서 1942년(단기4275) 겨울 태백산 남쪽 기슭 천평마을 주민 50여명이 천제단을 다시 보수하고 대한독립기원제를 올렸다.

그 뒤 한국전쟁 후 무장공비가 출몰하자 1955년에 국군이 천제단 앞에 헬기장을 만들면서 제단을 무너뜨렸다. 이후 태백산 천제는 1957년경을 전후해 봉화사람들 위주로 순수하게 지내왔다. 그러다가 1970년대 박정희대통령 시절 미신타파로 제의를 못하게 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당시 천제를 주관했던 사람이 대종교로 들어가게 됐고 그러면서 태백시에서 독자적으로 지내게 됐다.

1989년경 태백시장이 천제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시(市) 예산을 받아 행사를 치르게 됐다. 그 당시 단군영정을 천제단에 세우고 대종교 복색으로 천제를 지냈다고 한다. 1990년 10월 3일부터 태백문화원과 태백향토사연구회가 중심이 된 태백산천제위원회에서 특정 종교를 초월한 천제를 행하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천제단 주변의 계곡 일대에는 치성을 드리는 기도처로 사용된 크고 작은 적석탑과 석단들이 있으며 함부로 짐승을 잡거나 나무를 꺾는 일을 금하고 있는 신령한 장소다. 조속히 훼손된 제단을 구해 나라의 안녕을 구해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제천은 국가의 가장 중대한 행사

역대왕조가 봉행했던 제천은 당시로서는 국가의 가장 중대한 행사였다.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제사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정통성과 통치자의 합법성을 하늘로부터 부여받거나 또는 이미 부여받은 권력을 백성들에게 재확인시키는 통치차원의 의례였다. 제정일치 시대에는 국가 권력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행사인 셈이다.

제천은 아득한 원시시대 제정일치 의례와 관련돼 있기는 하지만 이른바 고대, 중세, 근현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진행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이어져온 민족의례 하나였다. 제천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근대나 현대 시각으로 본다면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형태를 달리해 그대로 존속되고 있는 것은 그 만큼 문제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신교, 카톨릭, 불교, 무속 등에서의 기도는 대상이 다르지만 결국은 기복과 염원이고 바람이다. 내용은 국태민안일 수도 있고 개인과 가정사일 수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변형된 제천의식을 생활속에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태백산 장군봉 천제단은 우리 민족의 신화와 연관돼 있다. 신화는 역사적 기록이 없던 시대에 탄생해 후대에 기록되면서 역사가 되고 명분을 얻는다. 명분은 곧 한 국가의 탄생신화가 되고 제천의식은 왕권의 권위를 갖는다. 이는 무의식 속에 하늘을 향한 염원이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제천단의 훼손은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자연스레 무너졌다면 우리의 국운이 쇠락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훼손됐다면 천인공노할 일이다. 우리나라 국운기도를 대표로 했던 한사람으로서 훼손된 천제단을 바라보는 마음이 몹시 두렵고 불편했다. 관련 기관은 복구에 심혈을 기울여주기 바란다.

▲ 정동근 승원역학연구원원장

[정동근 원장]
- 한국승원드론풍수협회·학회·연구회 회장
- 한국역술인협회·역리학회 상임부이사장
- 한국풍수지리협회 상임부이사장
- 국제역학대회 대상 수상(제26회 대만)
- 승원역학연구원 원장(舊 승원철학원)
- 대승불교본원종 승원사 주지(법명 명조)
- 전 세계일보 ‘오늘의 운세’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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