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박창희의 건강한 삶을위해] 인간의 대표적 욕구라 칭하는 식욕, 수면욕, 성욕을 살펴보자. 후천적 학습이 아니라 숙명처럼 타고 났음에도 성을 행함에 번민이 따르고 잠을 청함에 부족함이 있으며 저작을 통해 식괴를 목구멍으로 넘김에 가슴 아픔이 있다. 왜 그럴까? 이 중 식욕에 국한해 생각해보자. 어느 날 우리가 저녁 늦은 시간의 공복을 불같은 의지로 참고 들어왔다 가정해 보자. 하지만 현관문을 여니 이게 웬 재앙(?)인가.

길에서 마주친 오토바이 배달원이 우리 집에서 나왔음이 사실인 거다. 도우의 테두리마다 고구마와 치즈를 잔뜩 쑤셔 넣고 온갖 토핑이 하늘의 별처럼 박힌 피자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나를 반기는 것이다. 이제 막 피자를 한 입 베어 문 식구들은 말을 제대로 못 하니 손으로만 나를 어여 오라고 부른다. 복어처럼 입이 부푼 채 눈만 하염없이 웃는 아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내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잠드는 것은 인간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인류가 400만 년을 굶었는지, 250만 년을 굶었는지는 이 순간 중요하지 않다. 공복 유전자에 완패함으로 결국 인간다워 지기로 결심한 나는 통통한 피자의 테두리부터 한 입 베어 문다. 이윽고 아들 녀석이 건네는 얼음 채운 콜라를 한 잔 마시니 이 순간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체중 조절을 다짐한 대다수 사람이 첫날부터 이런 갈등을 겪는다. 그래서 다이어트를 다른 말로 “내일부터” 혹은 “내년부터”라 부르기도 한다. 심지어 “다음 생에”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다이어트 전문가 역시 야심한 밤의 헛헛함을 맨입으로 달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사람 역시 늦은 시간대에 음식을 먹는 행위가 비만의 원인이 됨을 잘 알고 있다. 야식을 끊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수면 전 극심한 공복감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한 것이 부족하여 우리 몸이 음식을 요구하는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취침 전 빈 배를 채우려는 욕망에 불과하다. 술을 포함하여 늦은 저녁 시간에 야식을 즐기는 습관을 갖고 있는 한 뱃살을 없앨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렇다면 야식을 비롯하여 불필요한 음식의 유혹을 매번 단호하게 뿌리칠 수 있다면 그자는 모 회사의 유산균 광고처럼 인간 수명 연장의 꿈을 달성할 수 있을까. 단언할 순 없지만, 소화기관을 말끔히 비운 채 잠드는 것이 많은 이득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의 몸을 식도부터 잡아채 빼내면 항문까지 한 줄로 달려 나올 터인데 그 길이는 무려 십수 미터에 이른다. 상호 협동 체계를 유지하며 유기적으로 연결된 우리 몸의 기관들은 제각기 고유의 역할이 있는데 협업을 통해 생명을 유지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몸은 대, 내외적 환경에 대항하여 항상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능력인 항상성을 갖고 있고 그로 인해 인간은 존재할 수 있다. 항상성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원만한 능력이며 그 근간이 되는 에너지를 인간은 음식에서 얻는다. 음식의 영양 및 열량을 이용하여 여러 조직을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인체는 전기를 이용하여 단순히 기계를 돌리는 공장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섬세한 일을 정교하게 해낸다. 밥 한 숟갈을 입에 떠 넣고 30리를 간다는 비유에 걸맞게 인간은 적은 양의 에너지로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설계된 경이로운 존재다.

아이러니한 점은 무언가를 먹는 행위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중대한 수단임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식괴(소화물 덩어리)를 저작을 통해 목구멍(식도)으로 넘기는 것과 괄약근을 조절해 몸 밖으로 밀어내는 정도에 불과하다. 식사든, 간식이든, 마트의 시식대에서 무심코 집어 먹든 우리 의지에 따라 목구멍을 타고 넘어온 무수하고 다양한 음식이지만 결국 이것을 처리하는 것은 오로지 내 몸의 몫이다. 그렇게 자신이 먹어 온 음식이 지금 나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 박창희 다이어트 명강사

[다이어트 명강사 박창희]
-한양대학교 체육학 학사 및 석사(동대학원 박사과정 중)
-건강 및 다이어트 칼럼니스트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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