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올 서울시 공익단체 지원사업으로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를 진행한다.

[미디어파인=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전란 중에 피란을 갔다 돌아오니 집이 불타서 없으면 심정이 어떨까. 일반 백성들이야 서리만이라도 피할 거처를 얼기설기 만든다지만 임금은 체통 상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민가에나 들지 않는 것이 예법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 갔다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오갈 데가 없었다. 태조 4년(1395년) 창건된 법궁인 경복궁이 전란 중에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선조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저택과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해 행궁으로 삼았다. 선조는 이곳에서 16년을 살았다. 광해군이 즉조당에서 즉위 후 경운궁이란 이름을 얻었다. 광해군은 7년을 살다가 법궁을 창덕궁으로 옮겼다.

한 동안 비었다가 고종이 아관파천 후 이 곳으로 돌아오면서 다시금 궁의 기능을 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헤이그 밀사 파견을 빌미로 1907년 황제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주게 됐고 경운궁은 상왕의 거처인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선조‧광해군 그리고 고종 황제의 공간 덕수궁

▲ 지난 5월 15일 오전 10시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3회 차가 덕수궁에서 진행됐다.

문화지평이 주관하고 서울시가 후원하는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3회 차는 조선왕조와 황제국가 대한제국의 역사를 한데 품고 있는 덕수궁에서 지난 5월 15일 오전 10시부터 진행됐다. 이번 답사는 서울을 구성하고 있는 궁의 시공간 역사와 수목 환경 생태를 함께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날 대한문 앞과 시청 일대는 거대한 ‘멜팅팟’이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 10주기 추모행사와 태극기부대 행사, 그리고 시청관장에선 드럼 페스티벌이 열리면서 각종 소음이 뒤섞여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특히 종교를 끌어들여 정치를 욕하는 중세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저급한 집회문화가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어 참담했다. 드럼페스티벌은 대형 스피커를 통해 북소리를 내보내는 바람에 멀리서도 듣는 이들에게 굉장한 스트레스를 줬다. 이들 소음이 해설사의 해설까지 집어 삼키는 바람에 해설사도 답사참여자도 모두 힘든 출발이었다.

각자 매표를 해서 대한문을 거쳐 덕수궁 안으로 들어갔다. 문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조그만 다리를 건넜다. 다리 이름은 금천교(金川橋)다. 1986년 복원했다. 일반적으로 궁궐 정문 안에 흐르는 명당수를 금천(禁川)이라고 부르고 다리는 금천교(禁川橋)라고 한다. 그러나 덕수궁은 금천교(金川橋), 경복궁 영제교(永濟橋) 창덕궁 금천교(錦川橋), 창경궁 옥천교(玉川橋) 등 고유 이름도 가지고 있다. 관리들이 다리를 건너면서 사특한 마음은 씻고 청렴한 마음을 가지란 의미를 담아 놨다.

금천교 건너자 아름드리 능수벚나무가 반겨

▲ 금천교를 건너면 능수벚나무 방문객을 반긴다. 석조전 앞과 창덕궁 낙선재서도 만날 수 있다.

금천교 우측에 능수벚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축 늘어트린 채로 서 있다. 궁의 벚나무라면 창경궁이 떠오른다. 일제는 창경궁에 벚나무를 잔뜩 심고 동물원까지 만들어 창경원이란 위락시설로 전락시켰다. 일제는 궁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거류하는 동네에도 벚나무를 옮겨다 심었다. 창덕궁, 남산, 장충단 등에 벚꽃이 많은 이유다. 밤 벚꽃놀이(야앵, 夜櫻)도 일본이 남겨 놓고 간 놀이 문화다.

여의도를 개발하고 윤중제 위에 도로를 내고 윤중로라 불렀다. 1986년 창경궁을 복원하고 그곳에 있던 1300여 그루의 벚꽃을 베어내지 않고 윤중로와 어린이대공원에 옮겨 심었다. 벚꽃나무 수명이 100년 정도란다. 그러니 앞으로 20~30년 정도만 꽃을 피울 거란 이야기다. 여의도 윤중로에서 벚꽃을 계속 즐기려면 지금쯤 대체목을 키워야 한다는 의미다.

서울서 벚꽃이 좋기로는 현충원이 손꼽힌다. 현충원에는 수령이 제법 오래된 능수벚나무가 있는데, 석조전 앞과 창덕궁 낙선재서도 만날 수 있다. 벚나무 열매가 버찌다. 한반도 남쪽 대표적 텃새인 직박구리는 익지도 않은 버찌를 따먹는다. 이유는 일찍 새끼를 낳기 위한 영양보충 차원이다.

열매가 하나 달려 있는 명자나무 앞에 섰다. 해설사는 명자나무를 집에 심으면 안 된다는 민가 속설이 있다고 했다. 아녀자건 처녀건 바람이 나기 때문이란다. 주홍색 꽃이 너무 매혹적이라서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던 모양이다. 안도현 시인은 ‘명자꽃’이란 시에서 ‘잎이 나기 전에 꽃 몽우리를 먼저 뱉는 꽃’이라고 표현했다.

명자나무, 여인들 바람난다는 속설로 집안에 안 심어

▲ 여염에서는 명자나무를 집에 심지 않는다. 명자꽃을 보노라면 아녀자건 처녀건 바람이 난다는 속설 때문이다. 답사 때는 꽃이 다 진 상태다. 사진은 자료사진.

근처에 키 낮은 맥문동이 빼곡히 심겨져 있다. 음지서도 잘 자라는 맥문동은 보라색 꽃이 올라올 때면 장관을 이룬다. 연못 가까이에 피어 있는 옥잠화는 한자로 구슬옥(玉)에 비녀잠(簪)을 쓴다. 꽃봉오리가 옥비녀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비추와 비슷하게 생긴 백합과 다년생 식물이다. 이들 식물로부터 최고급 명품 향수의 향이 만들어진다. 백송 한그루도 의연하게 서 있다. 큰 백송은 헌법재판소 뒤뜰에서 만날 수 있다.

다시 역사로 돌아간다. 조선은 개국을 한 후 한양천도를 하면서 궁보다 종묘와 사직을 먼저 만들었다. 고종 역시 조선시대를 종지부 찍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원구단을 만들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이론에 따라 하늘에 제를 지내는 단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게 쌓았다.

그동안 천자의 나라가 아닌 제후국에서 하늘에 제를 지내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이유 때문에 원구단 자체가 없었다. 고종은 1897년 광무 1년 대외적으로 황제의 국가를 선포하는 차원에서 제천의식을 원구단에서 열고 즉위했다.

1911년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원구단을 총독부 소유로 돌리고 1913년 이곳에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을 지었다. 해체해서 나온 부재는 이곳저곳에 팔아 고의적으로 훼손했다. 원구단 정문은 조선호텔 정문이 됐고 1967년 조선호텔이 신축되고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이듬해 매각 해체되고 1969년 5월 어디론가 팔려갔다.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 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 정문이 원구단 정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9년 지금 자리로 이전 복원됐다. 그동안 어디로 팔려갔는지 조차 몰랐다니 문화재에 대한 관리감독과 인식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황제국가 위상에 맞게 원구단 만들어 하늘에 제사

▲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원구단을 만들었다. 원구단 정문은 철도호텔(현 조선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우이동 그린파크 호텔 정문으로 팔리는 수모를 겪은 후 2009는 지금 자리로 복원됐다.

덕수궁의 궁역은 현재보다 세배 정도는 더 넓었다는 것이 해설사의 설명이다. 선원전 터에 세워졌던 경기여고와 미 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덕수초등학교, 중명전 등까지 포함하는 것이 옛 궁역이었다는 것이다.

일제는 1922년 덕수궁 선원전 터를 관통하는 도로를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덕수초, 구세군교회 등이 있는 길이다. 낭만적인 궁궐 외각 길이 아니라 덕수궁 궁역이었다. 일제는 길을 내고 덕수궁 터를 분할 매각했다. 그 자리에 외국 공사관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덕수궁이 원형을 잃고 궐내 각사들이 산만하게 배치된 이유다.

정관헌 앞에 이르자 덕수궁 궁역 변화로 지금은 밖에 위치한 왕실 도서관 수옥헌 이야기가 이어졌다. 수옥헌은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면서 중명전이란 이름을 얻었다. 을사조약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중명전은 정관헌과 함께 소위 ‘베란다건축’으로 불린다. 열강들이 날이 더운 지역에 지은 건축 양식이라 ‘식민지건축’이라고도 한다. 동서남 방향으로 회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관헌 곳곳에는 궁 주인의 수복을 기원하는 상징물이 많았다. 정관헌 용도는 고종이 쉬거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다.

고종의 휴식처 정관헌은 회랑 때문에 ‘베란다건축’으로 불려

▲ 정관헌 옆에는 단풍나무가 심겨있다. 사가에서는 단풍나무를 심기꺼리지만 궁에서는 자손번창을 기원하면서 많이 심었다고 한다.

정관헌 우측 옆에 단풍나무가 심겨져 있다. 사가에서는 단풍나무가 집안에 심기 꺼리는 나무로 전해오지만 궁에서는 자손번성을 담고 있다며 반드시 심는 수종 중 하나라고 한다. 단풍나무 열매가 많아 다산의 상징이라고 한다.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소나무 아래서는 다른 잡풀이나 수목이 살지 못하는데. 이유는 피톤치드(Phytoncide)는 식물을 의미하는 피톤(Phyton)과 살균을 의미하는 치드(Cide)가 합성된 말이다. 반면 사람에게는 매우 유용한 천연성분이다. 단풍나무 꽃이 질 때 프로펠러처럼 날리면서 씨를 전파한다. 실제로 헬리콥터 프로펠러 발명을 견인했다고 한다.

궁 담을 보는 팁도 나왔다. 서까래의 유무에 따라 외담과 내담이 나뉜다. 서까래가 있으면 궁과 외부를 나누는 담이다. 궁의 전각을 연결하는 문이 비교적 낮고 작은 이유는 겸손하게 다니라는 의미를 담았다. 건축과 수목이야기가 다이내믹 하게 섞여서 전개됐다.

회화나무의 자유분방한 가지 뻗음은 마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선비의 기상을 가졌다고 해서 학자수라 부르고 궁이나 반가, 동네어귀에 꼭 심었다. 또 기괴한 가지가 사악함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회화나무 꽃은 부적종이의 누런색을 염색하는 데 쓰인다. 이래저래 벽사 기능이 높은 나무다. 동네 어귀에 세 그루를 심으면 집안에 삼정승이 난다는 속설이 있다.

회화나무 뒤에는 쉬나무를 심는다. 쉬나무도 열매가 많아 다산과 다복의 상징이다. 열매는 동백나무 마냥 기름이 많이 나서 봉수대를 밝히는 용도로 사용됐다. 20년생 쉬나무 한그루에서 1년에 10kg 이상 열매가 나온다. 조선시대는 이사를 가면 회화나무와 쉬나무 종자를 꼭 챙겼다. 학자의 기개를 상징하고 등불을 밝힐 기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학자수 회화나무는 양반의 기개상징...쉬나무와 짝으로 심어

▲ 궁이나 양반가에 반드시 심는 회화나무는 벽사기능도 많은 나무다.

조경전문가의 수목 생태 해설은 끝없이 이어졌다. 복원 중인 돈덕전으로 가는 길에 만난 국수나무는 가지 중심에 흰 심지가 있다. 이를 빼보면 마치 국수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국수나무는 환경 지표식물이다. 공해가 심각한 지역에는 잘 살지 못한다. 반대로 잘 이 나무가 잘 자라는 곳은 환경이 괜찮다는 의미다.

감나무를 접붙이는 밑나무로 사용하는 고욤나무, 철쭉 등을 지나자 오리지널 유럽마로니에라고 부르는 가시칠엽수가 석조전 뒷곁에 자리 잡고 있다. 1912년 고종 육순 기념으로 네덜란드 공사가 선물한 나무다. 일명 고종의 나무다. 열매가 마치 밤같이 생겼다.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안된다.

흔히 덕수궁 미술관이라고 부르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앞에 핀 배롱나무를 지나면서 해설사는 퀴즈를 냈다. 꽃이 피는 색의 순서에 대해서. 생활 속에서 쉬 스쳐 지나는 부분이다. 복수초, 개나리, 생강나무, 산수유 등 노란색을 필두로 봄을 알리며 꽃이 핀다. 다음으론 벚나무를 앞세운 분홍, 뒤이어 이팝나무가 대표적인 흰색, 다음은 장미의 붉은색 순으로 대략 나뉘지 않겠냐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사실은 아니다. 해설사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덕수궁 안에도 당연히 오얏나무가 여러 군데 심어져 있다. 일명 자두라고도 한다. 후일 오얏꽃 문양은 대한제국 때 황실 문장(紋章)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갑오경장 이후 통신업무를 처음 시작해 1905년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기 전까지 54종의 우표를 발행했는데, 오얏 문장과 태극기가 주종을 이뤄 일명 ‘이화우표’라고 했다.

석조전은 말그대로 돌(石)로 만든(造) 전각이란 의미다. 일제 때 지어진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건축물이다. 고종이 외국사신을 폐현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현대미술품을 진열하는 곳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용했다.유엔한국위원단,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다가 2014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고종의 나무 ‘가시칠엽수’...육순기념 네덜란드 공사가 선물

▲ 유럽마로니에라고 부르는 가시칠엽수가 석조전 뒤꼍에 자리 잡고 있다. 1912년 고종 육순 기념으로 네덜란드 공사가 선물했다.

궁과 어울리지 않은 분수대를 지나 석조전 정면에 있는 등나무 그늘에 잠시 앉아 쉬면서 해설을 들었다. 칡(葛)나무와 함께 등(藤)나무는 ‘갈등’이란 단어를 만들어서 그다지 안식이 좋지 않은 수종이다. 등나무는 오른쪽으로만, 칡나무는 왼쪽으로만 감고 자라기 때문에 둘이 붙여 놓으면 영영 풀지 못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갈등이란 단어가 탄생한 것이다. 삼청동 국립총리공관에 가면 천연기념물 254호로 지정된 등나무가 있다.

편전으로 사용됐던 중화전 앞 조정(朝庭)에는 박석이 깔려있고 품계석이 줄지어 서있다. 그리고 끝에는 중화문이 있다. 임금의 즉위는 그리 성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살아생전 왕위를 물려주는 양위보다는 대부분 사후 즉위가 많았는데 이 경우 상중에 이뤄지기 때문에 간소하게 진행됐다.

문무백관이 왕위에 오르도록 예닐곱번을 청해도 울면서 고사하고 사양해야만 했던 자리다. 그러다가 대왕대비가 나서서 즉위를 권해야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중화문 끝에서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중화전으로 걸어들어가 어좌에 앉음으로써 즉위가 마무리 됐다.

중화문에서 편전까지 어로를 통해 걸어 들어갈 때 품계석에는 조정 관료들이 도열했다. 이들은 대부분 과거를 통해 등용한 인재들이다. 조선의 마지막 과거는 1894년에 있었다. 그리고 갑오개혁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과는 식년시의 경우 1차로 초시에서 각 도 인구 비례로 뽑고 2차로 복시를 실시해 33인을 등용시켰다.

33인은 임금 앞에서 3차로 전시(殿試)를 치러 갑을병으로 성적이 매겨졌다. 장원급제자는 종6품(참상관)으로 등용되고 성적이 나쁘면 9품인 능을 지키는 참봉에 임명됐다. 마지막 과거에서 급제한 홍종우는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 됐고 훗날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을 상해에서 총으로 살해한다. 이상설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밀사로 파견됐다. 친일파의 거두 윤덕영도 마지막 급제자였다. 지금의 역사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반추하면 지식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쉽게 답이 나온다.

중화전 뒤에서 준명당‧즉조당 등 보며 해설 마무리

▲ 좌로부터 준명당‧즉조당‧석어전 등이 나란히 서 있다. 덕수궁 전각 위치는 화재와 복원 등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옮겨지거나 역사 속에 사라지는 등 많은 변화를 겪었다.

중화전 뒤에 널따란 공간은 답사를 마무리하기 좋은 장소다. 그리고 준명당, 즉조당, 석어당 등을 마주할 수 있어서 설명하기도 좋다. 준명당은 고종이 환갑 때 낳은 덕혜옹주를 위해 만든 유치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종의 극진하고 애틋한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1916년 순종실록에는 고종이 준명당 유치원에 방문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덕혜옹주는 준명당 유치원을 마치고 일출심상소학교에 입학했다. 이는 충무로 극동빌딩(현 남산스퀘어) 자리에 있던 일신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이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했던 남산 밑 남촌에서 가깝게 세워진 것이다.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즉조당은 조선의 15, 16대 임금인 광해군과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 낸 인조가 각각 즉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보기 드문 한옥 2층 채인 석어당은 인조가 왜란을 피해 피란을 갔다가 환어해 머물던 공간에서 유래됐다. 오래전 임금이 살았던 곳이란 의미다.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유폐시켰고 광해군 자신도 인조반정 후 죄를 문책 받은 곳이다. 단청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석어당 옆에는 일국의 왕가와 황가의 영욕을 물끄러미 묵묵히 바라본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살구나무다.

해설사는 여염에 큰 살구나무가 서 있으면 그 옆엔 무조건 약방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살구나무는 뿌리부터 열매까지 약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또 살구꽃을 보고 길흉을 판단했다고도 한다. 덕수궁은 다른 궁에 비해 넓진 않지만 나름의 사연을 품은 전각과 다양한 수종이 공존하는 곳이다. 이 곳에서 진행한 ‘덕수궁이 품은 역사와 수목생태’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과 현대를 관통하면서 그 자리를 지켜온 수많은 나무와 꽃 등 생태자원을 알아간 유익한 시간이었다.

김태휘 해설사의 폭넓고 깊은 역사‧수목 해설 돋보여

▲ 김태휘 역사문화해설사는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 출간을 한 전국역사지도사모임 대표로 표석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번 해설을 맡은 김태휘 역사문화해설사는 창덕궁 궁궐길라잡이,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있으면서 역사와 함께하는 나무 이야기를 소개하는 전문가다. 문화유산아카데미, 전국역사지도사모임 대표로 있으면서 조선 왕릉과 골목길 해설 등으로 관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최근 표석시리즈 3탄으로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를 공저로 출간했다. <표석을 따라 경성을 거닐다>, <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 등 공저가 있다.

이날 해설을 마치고 마침 서울도서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전시중인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를 함께 관람하기도 했다.

■ 답사코스
대한문 - 정관헌 - 돈덕전 - 석조전 - 덕수궁미술관 - 중화문 - 중화전 - 함녕전 - 즉조당 - 준명당 - 석어당 - 덕홍전 - 광명문 <글=김범준·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사진=권택상 사진작가>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 다수 진행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