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전통시장 가치재조명‧관광자원화]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서울시의 미래유산 공모사업 일환으로 ‘시장의 가치재조명을 통한 관광자원화 아카이빙’을 시장 3곳을 대상으로 수행한다. 1회 차는 ‘건어물 성지’로 불리는 중부‧신중부시장을 했고 2회 차로 구로공단의 역사와 함께 한 구로시장을 기록한다.

■ 과거

1962년 시장 개장·2016년 서울미래유산 지정

▲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서울시의 미래유산 공모사업 일환으로 ‘시장의 가치재조명을 통한 관광자원화 아카이빙’을 시장 3곳을 대상으로 수행한다. 2회 차는 2016년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구로시장이다. 구로시장의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로20길 6-3(구로동 736-1)에 있는 재래시장이다. 1960년대 경인국도를 따라 구로공단과 주거지 등의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일대에 조성된 생활형 재래시장이다. 구로시장은 구로구에 있는 재래시장 중 가장 먼저 터를 잡았으며 4,776㎡ 규모에 구로시장 협동조합으로 개장했다. 개장 당시에는 한복 점포만도 100여 개로 구로공단과 함께 번창했다.

구로시장은 공단을 기반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을 주요 고객으로 한 장소로서 공단 사람들의 삶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곳이다. 평일, 휴일, 퇴근 후 생필품과 먹거리를 찾아오던 구로시장은 그들의 삶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구로공단은 IT산업 중심으로 변화했고 그에 따라 구로시장의 모습도 변했다. 가족 중심이던 사람들이 떠나고 대형마트가 들어서고 식료품 중심의 남구로시장이 발달하면서 구로시장은 의류, 침구, 한복 등을 주요 취급 품목으로 계속 자리 잡았다.

2012년 화재로 인해 27개의 점포가 전소됐고 시설이 낡아 안전문제가 대두, 2015년 현대화 사업을 착수했다. 신발, 잡화, 먹거리 등 점포 172개가 모여 있던 구로시장은 예산 29억을 투입해 구로동로 22길과 14길 골목 일대 300m 거리에 2,070㎡ 규모로 공사를 추진했다. 날씨에도 안전한 아케이드를 설치하고 간판을 정비했다. 또 소방도로와 소방시설, 바닥 포장 등을 했다.

노후 재난시설은 서울특별시에서 2억을 투입해 균열, 누수 등이 심한 곳은 철근콘크리트 지붕에 방수공사를 하고 붕괴 위험이 있는 돌판 지붕과 기둥은 철거하거나 교체했다. 구로안시장이라고도 부르는 구로시장은 현재 구로시장번영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볼거리(청년가게), 즐길거리(한복), 먹거리(분식 등)라는 세 가지 테마로 운영하고 있다. 주요 고객은 국내뿐 아니라 외국 노동자가 많고 주요 취급 품목은 의류, 식품, 잡화 등이다.’<서울미래유산 설명문>

공영주택 주민 위한 시장…구로공단 들어서면서 최대 호황

▲ 62년 12월 11일 구로동 공영 및 간이주택 입주식에 참석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

이상은 2016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될 시점에서 구로시장에 대해 조사 자료다. ‘구로공단과 주거지 등의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일대에 조성된 생활형 재래시장’이란 문구에 시장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구로공단은 1964년부터 1974년까지 10여년에 걸쳐 조성된 수출산업공단이다. 구로시장 개장은 이보다 앞선 1962년이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거지’라고 표현된 ‘공영주택’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도시 팽창을 가속화시키는 큰 계기가 됐다. 피난으로 비었던 도시가 전쟁이 끝나자 빠르게 사람들로 채워졌다. 전쟁 당시 서울 인구는 한때 60만 명까지 감소했다. 9.28서울수복 이후 다시 늘어났다. 전쟁 발발과 서울수복이 불과 3개월 시차만 있을 뿐인데 인구 변화는 드라마틱했다. 1953년 휴전 이후부터는 매년 10만 명이 넘게 불어나는 양상을 보였다.

폭격으로 황폐화된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은 국가에 의한 재건에 기대를 걸기보단 자발적으로 집을 고쳐 썼다. 정부는 정부대로 모자란 주택 공급하는 데 진력했지만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1955년부터 공영주택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공영주택은 자금 출처와 건축목적별로 부흥주택, 재건주택, 시범주택, ICA주택 등으로 불렸다. 공영주택은 주로 서울 변두리 지역에 들어섰다.

▲ 구로 공영주택 건설 현장과 입주식 모습. 항공사진으로 본 공영주택과 간이주택 현황.

성북구 정릉동과 안암동이 대표적이고 서대문구 창천동, 홍제동, 행촌동, 동대문구 휘경동, 회기동, 청량리동, 답십리동, 성동구 행당동 등에도 공영주택이 들어섰다. 도시는 그렇게 확장돼 갔고 구로지역에는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이 군용부지 위에 공영주택을 지었다. 후일 이 군용부지는 민간 소유로 확인되면서 쟁송에서 국가가 패소하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부터 구로동 일대에서 농사짓던 농민들을 대거 쫓아냈다. 이곳에 공영주택과 간이주택 짓고 인근에 ‘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로공단을 조성했다. 1960년대부터 수출산업단지로 조성되기 시작했던 구로공단은 1978년 한때 노동자만 무려 11만4000여명에 달했다. 1961년 12월 11일 박정희는 공영주택입주식 테이프를 커팅 하는 등 이 지역에 공을 많이 들였다. 박정희 정권은 공영주택 주민을 위해 1962년 구로시장을 개설했다.

당시 공영주택에 입주했던 전승환 씨는 “구로동 공영주택단지는 철거민과 영세민을 우선순위로 선발했는데 4000여 명이 몰려 경쟁률이 8대1에 이르렀다”며 “‘만약에 100만 원이 생긴다면 타이루 양옥집을 높이 지을 테야, 아서라 100만 원의 잠꼬대 말고 구로동 공영주택 수속을 해 보자’는 노래가 나올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 지역에서 농사를 짓던 전 씨 아버지는 벽돌공장에 취직했고 구로공단이 들어서면서 전 씨와 어머니, 여동생 모두 공장에 취직했다는 기억도 끄집어 냈다.

“아시나요? 구로시장의 비단길과 먹자골목”

▲ 구로시장 먹자골목 전경. 지금은 상호가 제법 있지만 과거에는 식당 이름이도 따로 없이 작은 간판에 1호집, 2호집, 3호집 식의 일련번호뿐이었다.

구로시장에는 비단길이 있었다. 남대문 시장, 동대문시장 다음으로 구로시장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구로시장 포목점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시장 양 옆으로 포목점 50여개가 늘어서 있어서 비단길이라고 불렀다. 그 숫자는 동대문만큼 많았다고 전해진다.

포목점은 공단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 때문에 생겨났다. 여성 노동자들이 명절 때 사가는 선물로 한복을 주문하거나 결혼 때 혼수를 이곳에서 구입했다. 많은 여공들이 한복을 입고 귀향길에 나서는 모습은 당시 흔한 모습이었다. 그만큼 한복 수효가 많았기 때문에 포목과 한복 모두 발달했던 것이다. 90년대 공단이 재편되면서 포목점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포목점이 하나 둘 문을 닫으면서 비단길도 빛을 바랬다.

포목과 한복 뿐 아니라 여성복, 남성복, 아동복, 수건, 양말 등을 함께 파는 양품점 거리도 유명했다. 일상 잡화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구로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시장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마트였다. 옛날보다 길도 정비되고 넓어졌지만 여전히 많은 옷가게와 양품점, 잡화점이 늘어서 있다.

▲ 과거 구로공단 여공들의 허기진 배와 입맛을 충족시켰던 ‘소울푸드’인 떡볶이집. 구로시장엔 노점서 따로 장사를 하다가 한 곳에 모여서 떡볶이를 파는 ‘칠공주떡볶이’가 유명하다

여공들에게 구로시장의 떡볶이, 순대 등 분식은 허기와 고단함을 달래는 일종의 ‘소울푸드’였다. 먹자골목을 만든 것은 어쩌면 여공들일지 모른다. 그만큼 이들의 구매력은 대단했다. 구로시장 먹자골목은 가리봉시장 먹자골목과 더불어 공단 사람들을 위한 대표적 먹거리 촌이다. 지금도 인근 상인들은 당시 퇴근 시간에 공단 여성노동자들이 길게 줄을 서서 문전성시를 이룬 장면을 기억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분식점 앞은 ‘웨이팅’ 문화가 일상화됐던 곳이다.

식당 이름도 따로 없었다. 작은 간판에 그냥 1호집, 2호집, 3호집 식의 일련번호로 시작하는 노점이 먹자골목 중앙에 진을 쳤다. 머리고기, 해장국, 순댓국을 파는 식당들이 지금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다만 이 곳을 찾는 손님들이 90년대 이후는 남구로역 인력시장 남성으로 바뀌었다.

구로시장‧공용주택‧공단이 들어 선 땅의 역사

▲ 박정희 정권 때 구로시장을 비롯해 공용주택, 구로공단 조성을 위해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 수용한 사건이 있었다. 대법원은 2017년 11월 농민 및 유족 측이 낸 6건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가 이자까지 2960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국가의 ‘야만성’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진은 1960년 대 구로공단이 조성되는 과정. 구로공단은 ‘한국수출산업공단 구로동공업단지’의 준말이다.

박정희 정권 때 구로시장을 비롯해 공용주택, 구로공단 조성을 위해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 수용한 사건이 있었다. 후일 ‘구로공단 농지 강탈사건 배상요구소송’으로 이어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60년대 초 서울시 영등포구 구로동은 논과 밭,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야산에는 미8군 탄약고가 자리잡고 있었다. 청계천 등 서울 중심가 재개발에 따라 밀려난 난민들이 모여 살던 난민촌이 있었다. 이처럼 원주민은 별로 없는 한적한 변두리 지역이었다. 당시 구로동 전체인구는 2만8000여명 정도였고 가옥은 5500호 정도였다.

개발 가능 부지 중 국유지가 90%에 달했다. 사유지는 토지 보상 및 철거 과정에서 약간의 마찰은 있었지만 토지수용법 적용을 우려한 지주들이 수출산업공단 요구를 수락함으로써 비교적 순조롭게 매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외견상 평온한 토지 수용 과정의 이면에는 복잡한 갈등 요소가 숨어 있었다. 공단용지로 불하한 토지가 실상은 농지개혁 과정에서 분배된 민간 보유 농지였기 때문이다. 공단 용지 중 국유지 일부는 1942년 ‘조선토지수용령’에 의해 일본 육군성이 헐값에 강제 수용한 토지다.

이들 토지는 해방후 귀속농지로 분류돼 신한공사, 중앙토지행정처에서 관리되다가 농지개혁법에 의해 1950년 6월 원소유주 및 경작자에게 분배됐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일시 중단됐던 농지분배 후속절차가 진행되면서 농민들은 해당 농지에 대한 농지분배 상환곡을 2~3회 납부했다. 그런데 국방부가 일제의 군용지였다는 점을 들어 해당 농지를 국방부 관할 토지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국방부의 반발에 부딪친 서울시는 이들 농지에 대한 상환곡 징수를 중단했다.

그러나 그 뒤 군용지로 활용했다는 국방부의 주장과 달리 해당 농지는 농민들에 의해 계속 경작됐다. 등기부나 지적도 상에도 여전히 전답의 형태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1961년 9월 정부는 산업진흥 및 난민 정착 및 구제를 앞세워 해당 토지 관리권을 국방부에서 재무부로 이관해서 경작농민들을 내쫓고 서울시가 간이주택 등을 지어 청계천 판자촌 철거민 등에게 분양하도록 했다. 그리고 남은 토지를 공단 용지 등으로 1963년 10월 불하했다.

그러자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1964년 초 농지의 이중 불하를 주장하며 서울시, 농림부,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주민 탄원만으로 대통령 지시에 따라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시행하는 공단 용지 수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200여 명의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영등포구청도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서울시장에게 농지 분배 사실을 확인했고, 주민들은 그 사실을 법원에 제출했다. 주민들의 조직적 저항이 이처럼 거세서 행정력만으로 제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주장의 법률적 근거도 분명해서 사법적 쟁송과정에서 패소 가능성이 커지자 정부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정부는 관할 기관에 농지 분배 취소를 지시했고 1964년 4월 서울시는 해당 농지가 분배 대상 착오로 인해 잘못 분배되었다며, 농지분배를 취소하는 행정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민사법원에서는 농지 분배가 확정된 뒤에 분배 전의 사유를 문제 삼은 서울시의 농지분배 취소처분은 효력이 없다며 정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관련 공무원들의 농지 분배 사실에 대한 법정증언과 현장 문서 검증 등을 통해 해당 농지의 분배 사실을 확인하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 뒤 4년여의 소송 절차를 거쳐 1968년 대법원이 원고 승소를 최종 확정지었다. 법정 다툼은 완결됐지만 정부는 1967년 4월 공단 조성을 완료했고 1968년에는 입주까지 완료, 일부 공장이 가동되고 있었다.

특히 수출산업공단을 수출입국 한국의 상징으로 삼았던 정부로써는 이 같은 걸림돌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이에 대법원의 확정 판결 직후인 1968년 3월 서울지방검찰청이 나서서 관련 서류 위조 혐의로 농지 분배 사실을 증언한 공무원을 구속하고 경작농민 42명을 사기 및 위증 혐의로 입건하는 등 ‘소송사기’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증거 미비 등으로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상당 수 농민들이 무혐의나 기소 유예 등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결국 정부는 공단 부지를 되돌려 줘야 할 상황에 내몰렸다. 그러자 구로공단의 성패에 주목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초 구로동 농지소송사건 경과 조사를 직접 지시했고 대통령비서실에서 ‘서울시 구로동 대지분규 보고’ 문건을 보고하자, 결재란에 친필로 ‘법무부장관으로 하여금 정부 측이 패소되지 않도록 가능한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을 지시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70년 4월 중앙정보부는 농민과 공무원이 결탁해서 군용지를 가로채려 한다는 첩보를 받고 검찰이 수사 중인 데도 조사에 나섰고 검찰 또한 관련자 68명을 사기·위증 혐의로 체포하는 등 전면 재수사에 착수했다. 수사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와 검찰은 대통령 지시 사항의 이행을 앞세워 관련 공무원의 허위증언 유도, 경작농민에 대한 불법 감금 및 가혹행위 등을 자행했다.

증거도 불충분하고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는데다가 이미 불기소처분을 받은 사건 당사자들을 체포 이유도 알리지 않은 채 집단적으로 불법 연행해서 구속 영장도 없이 경찰서나 호텔 등지에 구금했다. 불법 감금 상태에서 검찰은 이들에게 소송 사기를 시인하거나 민사소송 취하 및 권리 포기 각서 작성을 강요하며 발가벗긴 채 구타를 가하고 화장실에서 재우거나 수돗물을 강제로 먹이는 등의 가혹 행위를 가했다.

이 같은 협박과 구타를 못 이겨 민사소송을 제기한 200여 명의 경작농민 가운데 143명이 소취하나 권리 포기 각서 작성한 뒤 석방되거나 불기소 처분됐고 이를 거부한 41명은 기소됐다. 형사재판은 1984년까지 14년 간 지속돼 민사소송 결과와 달리 ‘해당 농지가 농지분배 대상이지만 분배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기소된 농민 중 12명은 사망으로 공소 기각, 1명은 무죄, 2명은 15년 공소시효 만료로 면소 판결, 25명은 유죄를 확정했다.

그리고 정부는 이러한 판결을 근거로 민사소송의 재심을 청구해서 1989년 대법원으로부터 해당토지가 국가 소유라는 최종 판결을 이끌어내며 승소했다. 그러나 관련 농민과 유족들은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위)에 소송 사기 조작 의혹을 제기하며 진실 규명과 명예회복을 신청하면서 다시 논란이 불거졌다.

진실위에서는 농지 분배 사실을 확인하고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남용과 농민의 불법 연행 및 가혹 행위, 허위 증언에 의한 무리한 기소 사실을 밝혀내 국가의 사과 및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을 권고했다.

이어진 형사재판 및 민사재판 재심 청구 소송에서 이들은 모두 승소 판결을 받았다. 피해자 유족들의 민·형사 재심 청구가 잇따랐고 대법원은 2017년 11월 농민 및 유족 측이 낸 6건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가 이자까지 2960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렇듯 구로시장과 공영주택이 들어선 땅에는 국가 폭력이라는 ‘야만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

■ 현재 : 과거와의 공존

남구로시장과의 공존…경쟁 아닌 기회

▲ 구로시장과 인접한 남구로시장 전경. 원래는 노점지역이었던 것이 통행량이 많아지면서 시장 기능이 강화됐다. 인정시장으로 등록하고 문광형시장 육성사업을 진행하는 듯 후발주자가 앞서가는 형국이 됐다. 구로시장과 남구로시장은 취급 품목군이 완전히 나뉘어져 있어서 경쟁관계가 아닌 협력관계의 거대시장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공영주택이 들어서면서 거주민들을 위한 시장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때 만들어진 것이 구로시장이다. 구로동에 위치한 구로시장은 1960년대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전통시장으로 50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요품목으로는 의류, 한복, 농수축산물, 식품 등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시장인 만큼 소문난 맛집이나 특색 있는 점포들이 많아 다양한 먹거리, 볼거리, 체험 등을 즐기실 수 있다.

현재 구로시장 일대는 구로시장과 남구로시장으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다. 구로시장이 성행할 때 상권을 잡지 못한 행상들이 새로운 길에 하나 둘 자리를 잡으면서 형성됐다. 원래 노점이었던 남구로시장이 먼저 인정시장으로 등록되면서 지금은 더 발달했다. 구로시장은 의류와 침구류, 포목과 한복 등을 취급하는 시장으로, 남구로시장은 채소와 과일 등의 먹거리를 구매하는 식료품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남구로시장이 자리 잡은 구로장터길은 주요 보행통로라서 유동인구가 많고 중국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료품점, 잡화점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 길은 구로시장의 옛 이름인 ‘구로장터’에서 따온 것이다. 시장 원조인 구로시장 입장에서 보면 아쉬운 부분이다.

구로장터길이 발달한 이유는 남구로역의 생성과 도시의 구조 변화 때문이다. 구로시장보다 빈번한 통행로로 이용되면서 거래가 활발해지고 길도 넓어졌다. 게다가 구로시장보다 먼저 문화관광형시장(문광형시장) 육성사업을 거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상태다. 구로시장은 내년부터 문광형시장 육성사업을 시작한다. 구로시장은 한복으로 유명한 시장이다. 2016년 한때 골목형시장 육성사업으로 구로시장 한복매장을 다시 한 번 홍보하는 계기가 된 적도 있지만 그때뿐이었다. 한복 자체가 사 입는 옷에서 대여하는 옷으로 개념이 바뀐 탓도 있다.

구로시장은 공영주택 거주민과 구로공단 공원(工員)들이 주로 이용했다. 구로공단 주변에는 가리봉시장(서울미래유산)이 있었다, 규모는 한때 구로시장보다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시장 역시 산업구조 변화로 공단 입주기업들이 하나 둘씩 줄면서 같이 쇠락했다. 1995년에는 구로공단의 노동자 수가 총 4만2000여 명까지 줄었다. 종사자 수와 함께 구로시장도 쇠퇴를 시작했고 지금은 중국 노동자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만 주로 중국식품점이 많은 남구로시장 쪽이 수혜를 받고 있다.

구로시장은 특성화 시장을 진행한 후 아케이드를 씌워 대형마트 못지않게 편리하고 깨끗한 쇼핑환경을 고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청년들에게 점포를 내줘서 시장을 살리고자 ‘영플라쟈’ 존도 개발하는 등 다양한 콘텐츠 개발에 힘을 썼지만 이마저도 지원기간이 끝나면서 동력을 상실해 지금은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 놓였다.

구로시장의 숙제는 남구로시장에 유입된 고객을 구로시장도 경험할 수 있도록 적극 유인하는 것이다. 구로시장과 남구로시장은 차분한 전통시장과 역동적인 시장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흥미로운 시장 공간이다.

남구로시장과의 공존은 경쟁구도가 아닌 구로시장의 기회다. 구로시장 상인들도 이 부분은 적극 수긍한다. 전체 마켓을 놓고 봤을 때 남구로시장 쪽이 식품에 강하다면 구로시장은 의류와 생활용품, 떡‧기름 등 상품 구색 면에서 황금분할을 하고 있다.

아픔 딛고 일어선 현대화의 시간

▲ 구로시장은 2012년 3월 큰 화재가 났다. 이를 계기로 시설현대화 사업을 통해 아케이드를 설치, 쾌적한 쇼핑 공간을 조성했다.

2012년 3월 15일 새벽 1시 구로시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화마는 점포 27곳을 집어 삼키고 1시간 만에 진화됐다. 다행이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당시 소방서 추산 3500만원대 피해를 입었다. 소방대원들이 출동했지만 미로처럼 복잡한 시장내부 구조 때문에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피해가 더 커진 것은 불문가지. 인근 90개 점포 중 60여 곳이 피해를 입었고 27곳은 완전히 소실된 참사였다.

2016년 5월 구로시장은 경쟁력 강화와 위험 시설물 개선을 위한 현대화 사업을 완료하고 새단장한 모습으로 개장식을 열었다. 구로구는 2015년 말 시작한 구로시장 현대화 사업을 위해 약 29억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현대화 사업은 구로동로22번길 일대 면적 2070㎡, 길이 300m 구간의 시장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시장골목 천장에 아케이드를 설치해 날씨에 관계없이 편리하게 장을 볼 수 있게 했다. 또 점포마다 제각각이었던 간판 75개를 통일된 색상과 디자인으로 교체됐다. 천장에는 LED 조명이 설치했고, 안전을 위해 소방도로 확보, 바닥 재포장, 소방시설과 한전주, 통신주 정비도 실시됐다. 2012년 화재에서 얻은 교훈을 현장에 잘 적용했다.

이런 현대화 사업을 통해 구로시장은 화마로 인한 상처와 낡은 이미지를 조금씩 벗고 현대화로 한 발짝씩 앞으로 나가고 있다. 내년부터는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 대상지로 선정돼 2년간 지원을 받는다. 디자인‧ICT융합사업, 자생력강화사업, 기반설비사업, 이벤트홍보사업 등을 통해 새로운 변신을 도모하게 된다. 발맞춰 구로상인회 사무실도 리모델링을 통해 상인들과 시장을 찾는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강화했다.

■ 미래

문광형 시장 육성사업 대상…한 단계 도약 기대

▲ 2020년부터는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을 시작해 한 단계도약의 전기를 맞을 예정이다. 사진은 상가들을 이용해 구로시장 외곽 권역을 표시한 것이다.

구로시장은 2020년 중소기업벤처부가 지원하는 희망사업 프로젝트 ‘문화관광형’ 육성사업 대상지로 선정돼 한 단계 도약을 기대하고 있다. 구로시장은 1960~70년대 최고 전성기를 지나 지금은 산업구조 변화, 대형마트의 등장 등으로 위축된 상황이다.

이같은 침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구로시장은 내년부터 적극적으로 역사, 문화, 관광자원을 활용한 문광형시장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구로시장상인회는 향후 구로시장 스스로 지역문화를 창출하고 형성하는 지역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변모할 필요가 있다고 자각하고 이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지난 2014년 상인대학을 중심으로 의식변화를 꾀했고 2016년에는 골목형시장 육성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등 2020년 문광형시장 육성사업 기반을 마련했다.

구로시장은 한복 중심의 전통한복거리, 생활 패션거리, 떡볶이 거리, 떡‧기름 등 다양한 먹거리로 특화를 이루고 있는 거리다. 구로시장 한복매장들은 우크라이나 조선인들에게 한복을 전달하는 등 구로시장을 유럽에도 알렸다. 또 중국교포 결혼식 때 한복을 지원하는 홍보마케팅을 통해 꾸준한 매출 증가세를 보였다. 패션거리에는 주요 메이커는 없지만 값싸고 질 좋은 각종 의류를 판매하고 있어 서민층과 외국인 대상으로 적합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구로시장상인회는 문광형시장 육성사업을 통해 정이 모이고 정이 펼쳐지는 곳, 정보가 모이고 소식이 펼쳐지는 곳, 구로시장을 통해서 팔방으로 펼쳐나가는 ‘구통팔달’ 시장으로 거듭나겠다는 것이 목표다.

문광형시장 육성사업이란?

▲ 사진은 2016년 진행했던 골목시장육성사업 중 아케이드 공사 준공식 때다. 구로시장은 2020년 문광형시장 육성사업 대사지로 선정돼 역사와 전통, 문화, 관광자원을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문화관광형시장이란 전통시장을 지역 고유의 자원(관광·문화·예술·특산품)과 연계한 특화시장으로 육성하기 위해 문화공간조성, 관광 상품개발, 문화콘텐츠 개발, 문화공연 등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2008년부터 시행됐다. 시장브랜드 구축, 지역관광지와 연계, 스토리텔링 도입 등으로 시장 매출 증대 및 고객유인에 기여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관광, 문화, 예술, 특산품 등 지역 고유 자원과의 연계를 통해 전통시장의 특성을 발굴·개발해 문화관광이 접목된 시장으로 육성하는 것이다. 문화지평이 하고 있는 서울미래유산 구로시장의 가치 재조명을 통한 관광자원화 아카이빙 사업도 문광형시장 육성사업의 마중물인 셈이다.

지역축제, 관광자원과의 연계로 전통시장 내 다양한 먹거리·볼거리·즐길거리·살거리 등의 콘텐츠 개발하고 이에 대한 홍보, 마케팅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국비(50%)와 지방비(50%)를 매칭해 지원한다. 올해까지는 시장 당 3년간 최대 18억원 이내 지원했지만 내년부터는 변동이 있을 예정이다.

‘문화관광’은 ‘문화’로 형성되어진 ‘관광’으로 타지역 문화에 대한 수준향상, 지식습득, 체험과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전통시장은 시장 시설환경이나 서비스 운영방식, 기존 시장과의 경쟁환경, 관광자원으로서 적극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비롯해 여러 가지 문제가 되는 사회·환경적인 요소로 인해 점점 낙후돼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일률적인 시설개선에만 집중하다보면 전통시장만이 갖고 있는 최고 장점인 지역커뮤니티로써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정부는 사라져 가는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한 취지하에 문화·관광을 연계한 ‘문화관광형시장’을 선정해 새로운 형태의 전통시장을 육성하기로 했다.

문광형시장 육성사업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지역특색 연계
•지역 고유의 자원(관광지, 특산품, 유무형 문화 등)과 연계를 통한 시장 브랜드화
•지역축제·문화자원 활용한 문화체험활동 개최
•지역특산품, 먹거리 중심 테마거리 등 특산품 육성

② 특화시장 운영
•(외국인주민 특화문화시장 도입) 외국인 집중 거주지역에 외국인주민 특화문화시장 시범도입을 통해 지속 증가중인 국내거주 외국인주민의 전통시장 유입촉진
•(서비스디자인 도입) 고객 시장방문 프로세스 중심의 리서치를 통한 서비스디자인 도입으로 소비자 중심의 특화요소 발굴 및 고객쇼핑 편의 제고

③ 디자인·ICT융합
•전통시장에 문화‧ICT‧디자인을 융합하여 특색 있는 전통시장 육성 및 고객쇼핑 편의 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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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시장의 매력 포인트(상인과 콘텐츠)

구로시장상인회 모상수 회장 “문광형시장 성공적 진행 소망”

▲ 서울미래유산 시장 아카이빙 팀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구로시장상인회 모상수 회장. 그는 시장에서 40년 가까이 떡집을 운영하고 있다. 문광형시장 육성사업을 진행하는 막중한 소임을 맡고 있다.

1979년 구로공단에 식자재를 납품하기 위해 구로시장에 터를 잡은 구로시장 상인회 모상수 회장. 그는 떡집을 하는 친구의 권유로 업종을 바꿔 떡집을 시작했다. 구로시장 떡집은 시장의 역사만큼 길다. 떡집을 비롯해 구로시장을 구성하고 있는 포목, 한복, 참기름, 먹자골목 역시 시장이 개장하면서부터 역사를 같이 한다.

구로시장에 발을 들일 때 첫 느낌에 대해 그는 “사람이 많아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로 번화했다”고 기억했다. 주로 구로공단 근로자들이 손님이었고 남구로시장은 존재하지 않았을 때라고 설명했다. 2016년 10월부터 상인회장을 맡은 그는 골목형시장 육성사업, 1차 아케이드 설치를 완수해 시장 방문 고객을 12.5% 늘렸고 이에 따른 매출을 11.1% 증가시켰다.

모 회장은 구로시장의 자랑이나 매에 대해 묻자 “인정 많은 시장”이라고 간명하게 답했다. 상인들 나이가 60~70대, 심지어 80대까지 있고 오랫동안 장사만 했던 사람들이라 ‘정’ 데놓고 이야기하기가 곤란하다는 의미다. 구로시장은 한창 호황이던 70~80년대 후반은 서울서 서너번째 큰 시장이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듯 호황기를 거친 구로시장엔 상인들의 끈끈한 정이 남아 있다.

‘영플라쟈’는 구로시장의 아픈 손가락이다. 영플라쟈를 소생(?)시키려는 구청과 구청장의 의지는 강한데 점포주들과 뜻이 달라 진행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영플라쟈는 청년상인 창업지원 프로그램 일환으로 2년간 창업자금이 지원되다가 중단되면서 임대료 부담이 늘자 청년들도 자리를 뜬 상황이다.

14개 점포가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5개 점포만 남은 상태다. 영플라쟈가 활성화된 상태에서 문광형시장 육성사업이 시작됐더라면 시너지가 날 수 있었던 상황인데, 만시지탄인 셈이다. 구청에서 영플라쟈 구역 몇 개 점포를 매입하는 등 여전히 활성화를 위해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구청은 문광형시장 육성사업과 시너지를 낼 획기적인 모델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불가게, 떡집, 한복집, 그릇집이 많은 이유에 대해 모 회장은 “전적으로 구로공단 때문”라고 말했다. 특히 참기름집이 많은 이유는 떡집 때문이란 재미난 진단을 내놨다. 현재 시장 떡 관련 단체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한때 34개였던 떡집이 지금은 18개로 남구로시장 쪽에 더 많다”며 “참기름은 생활소모품이기도 하지만 떡집에서 많이 쓰기 때문에 이 시장에 점포가 많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문광형시장 육성사업과 관련 모 회장은 “1차 아케이드 사업할 때 못한 것이 많았다”며 “TV전광판, 상가돌출간판 등과 함께 다양한 시장 활성화 사업을 사업단과 협의해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내년도에 회장 임기가 끝나기 때문에 차기 회장에게 막중한 일을 넘기게 된데 따른 미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면서 말하는 듯 했다.

남구로시장과의 협력도 강화시키겠다고 했다. 과거 현대화사업을 진행할 때는 다소 거리가 생겼지만 지금은 구로‧남구로시장을 하나의 시장으로 여기고 협력해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이는 내년도 문광형시장 육성사업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남구로시장은 문광형시장 육성사업을 먼저 했던 ‘선진지’다. 때문에 남구로시장의 협력과 조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모 회장은 구로시장의 매력에 대해 “시장떡집 같은 3대 가업을 잇는 점포, 대를 이은 노바(남성복), 전 상인회장님이 하는 신발집(믿음화점), 한성주단, 떡볶이, 국수집 등이 유명하다”며 “최근 들어 대를 이으려는 상점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구로시장의 가장 큰 장점과 매력은 ‘인정과 대를 잇는 전통’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구로시장 산증인 믿음화점 김정자 씨, “시장은 친절해야 한다”

▲ 2012년 화재 때 완전히 불타 없어진 믿음화점을 다시 재건해 85세까지 장사를 하겠다는 이종운 전 상인회장(좌측서 두 번째)과 부인 김정자(우측서 두 번째) 씨. 아카이빙 팀과 기념촬영을 했다.

비단길 끝에는 믿음화점이 있다. 다른 곳에서 1975년 새마을화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오래된 점포다. 인쇄소를 하다가 상황이 어렵게 되면서 구로동으로 이사를 왔다가 지인의 권유로 신발장사를 시작했다. 1987년 지금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12년 발생한 구로시장 화재 때 완전 소실된 곳 중 한 곳이다. 그래서 믿음화점은 점포를 새로 지었다.

패션거리에는 양품점도 많았지만 신발가게, 가방가게와 같은 패션에 관련된 점포들이 모여 있다. 과거 믿음화점은 구두를 팔 때마다 구로공단 아가씨들에게 스타킹 한 켤레씩을 서비스로 주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믿음화점은 이종운(79) 전 상인회장 대신 부인 김정자(77) 씨가 대신 인터뷰에 응했다. 김 시는 구로시장이 매력적인 시장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첫째가 친절해야 한다”고 입을 뗐다. 김 씨는 “손님들에게 솔직하게 대해서 신용을 얻어야 하고 당연히 물건이 좋아야 한다”며 ““‘저 집은 주인이 참 진실 하더라’라고 소문이 나야 손님이 오는 시장이 된다”고 말했다.

“옷이며 신발이며 입어보고 신어보고 안 사갈 때도 있지만 절대 화내지 말고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김 씨는 시장의 매력은 ‘상인의 친절’과 ‘상인과 고객 간의 존중’이 필요하단 점을 강조했다.

“구로시장은 물가가 싸고 서민들이 살기 좋은 곳입니다. 주로 오시는 분이 서민들이라 ‘정’이 많아요. 구로시장은 큰 변화 없이 이대로 상인들 건강하고 올바르게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회장님과 저 모두 건강합니다. 85세까지 일하고 은퇴할 겁니다” <이밖에도 많은 상인들과 시장이용 고객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서울미래유산 아카이빙팀은 추후 지속적으로 인터뷰를 보강할 것이며 책자를 발간할 때는 많은 분들의 이야기가 실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구로시장은 대물림이 활발한 곳이다. 시장떡집은 구로시장서 유일하게 3대가 가업을 이어 받은 곳이고 남성복 노바도 2대째 대물림을 했다. 칠공주떡볶이는 ‘60대 신진’(?) 할머니가 자리를 이어 받았고 대를 잇지 못하는 곳은 원년 사장이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아직도 활기찬 모습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활기와 정이 넘치는 시장이다.

재미있는 구로시장 주변 이야기

구로동에는 유난히 점집이 많다. 다세대주택에 꽂혀 있는 빨간 깃발은 점집 표시다. 남구로역쪽에서 구로시장으로 진입하는 주변 주택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옛날 구로동 일대는 논밭과 무덤이 많았다.

서울 서남부에 위치한 구로구는 동쪽에서 안양천과 도림천에 의해 형성된 범람원이 넓게 형성된 곳이다. 때문에 땅이 습하고 질척였다. 이 지역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회자되는 습지가 많은 동네였다.

점집이 많은 이유는 정확하진 않지만 음기가 강한 지역이기 때문이란 설이 있다. 무덤이 많은 것도 점집과 무관하진 않아 보인다. 구로시장에 떡집, 한복집, 과일가게, 제사만물상 같은 가게들도 구로공단 뿐 아니라 점집과도 연관이 있던 것이다.

구로구의 중심동인 구로동은 현재 구로본동과 구로1동∼5동의 6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돼 있다. 동명과 관련 옛날 이곳에는 9명의 장수한 노인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경기도에 속해 있다가 1949년에 서울 영등포구로 편입됐다. 1980년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발전 계획이 수립되면서 영등포구로부터 구로구가 분리 신설됐다.

아홉 노인 중 한명이 고개에 심은 향나무

▲ 지금도 급한 비탈길로 남아 있는 구로5동 523-29. 상나무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주소에는 현재 무속신앙을 하는 영업집이 나온다. 옛날 서낭의 역할을 했던 상나무의 유래와 무관핮 않아 보인다. 상나무재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급경사다. 길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구로리마을이 나온다. 그곳에는 지금도 떠버리농산물직판장과 떠버리정육점 등 지명을 사용하는 상호를 가진 상점이 남았다.

구로5동 523-29는 비탈진 지역에 위치해 있다. 이 곳에 심겨져 있던 향나무로 추정되는 ‘상나무’ 때문에 상나무재라는 지명이 붙었다. 이 상나무는 구로구의 유래가 된 아홉 노인 중 한 사람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수령이 500여 년이 넘은 나무로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 역할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 밑에서 기원, 기우제 등 망신들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또 상나무재를 넘을 때는 반드시 절을 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나무 썩고 도시개발 등으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자 20여 년 잘라 없앴다. 현재는 나무가 있던 위치에 가옥이 들어서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주민 중에 상나무 아래에서 찍은 사진을 간직한 주민이 있어서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거리공원 쪽에서 상나무재를 넘어서 구로역쪽으로 가다보면 구 AK플라자(전 애경백화점)가 보인다. 구로구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다. 1993년 8월 30일 허가를 받아 1994년 9월4일 영업을 시작했다. 지하 5층 · 지상 8층 규모로 연면적 약 9만4000여㎡에 매장면적이 약 2만2388㎡에 달한다. 구로역과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까닭에 구로구의 중심 상권이었지만 신도림역 상권의 발달로 주춤했다. 그러다가 올해 이랜드그룹에 매각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졌지만 스토리가 남은 옛 지명들

▲ 구로시장은 100년 후 후손들에게 물려 줄 귀한 서울미래유산이다.

구루지마을 : 하구로리(下九老里)의 옛 명칭으로 구로동 가운데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원래 구로리는 상·중·하 3개 마을로 형성됐는데, 그 중 가장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 구루지마을이다. 지금의 구로5동주민센터 동남쪽 일대가 구루지 마을로 특정된다. 지금의 보건소와 구로5동 주민센터 주변에서 신도림역으로 이어지는 마을이라고 한다. 얼마전까지 있었던 떠벌이시장 주변이 구루지 마을이라는 설도 있다.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차는 단골 침수 지역이었다. 구루지마을 중심지는 구 AK플라자 뒤편 부근이라고 한다.

늑대다리 : 구루지마을 뒷편은 산이었다. 이 산에서 흘러내린 크고 작은 물길 때문에 자연히 많은 다리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구루지마을 뒷편에 해당되는 기아산업 중기사업소 정문 앞에는 꽤 넓은 냇가가 형성돼 있었다. 이 곳에는 다른 곳과는 달리 토교(土橋)가 놓여 있었다. 인근 야산이 낮기는 했지만 숲이 무성했다. 또 마을 뒤편이라 후미진 까닭에 한낮에도 사람들이 혼자서는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늑대가 많았고 도둑들도 이곳에서 지나가는 행인의 금품을 가로채기 일쑤였기 때문에 이곳 다리를 늑대다리라고 불렀다. 지금은 복개 돼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옻우물 약수터 : 상나무재에서 늑대다리로 가자면 오른쪽은 산이고 왼쪽은 논이었다. 그 가운데로 길이나 있다. 그 길로 늑대다리를 거의 다가서 산 밑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 샘물이 있었다. 약수로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인근 마을 사람은 물론 먼 곳에서도 퍼갔다. 매월초하루와 보름이면 이 약수에 고사를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이 지역에 많았던 미신 습속과 연관이 있다. 옻 오른 사람이 마시면 잘 나았다고 해서 옻우물약수라고 불렀다.

주막거리 : 늑대다리 부근 경인가도 변에 주막과 대장간을 포함한 서너 채의 집이 있어서 주막거리라고 불렸다. 현재 경인로 앞 기아산업 중기사업소 일대에 해당된다. 주막거리에서 멀지않은 곳에 경부선, 경인선의 분기점이 되는 구로역이 자리 잡았다.

각만이마을 : 각만이 마을은 현재 구로5동사무소 서쪽 구 AK플라자 오른쪽에 있던 마을이다. 풍수가들이 이 지역에 수만호의 집이 들어앉을 것이라고 예언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많은 건물이 들어서고 인구밀도가 높을 뿐 아니라 유동인구도 많은 동네가 됐다. 예언이 맞은 건지 도시 확장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재미있는 구전이다. 이 마을 뒷동산은 각만이동산이라고 불렀다. 숲이 매우 우거진 곳으로 구루지마을 뒷산과 연결된 것으로 추정된다.

새말 : 구로5동의 동쪽 산기슭에 새로 생긴 마을로 처음에는 윤씨 농막과 서너 채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 구로구에는 원각사와 관음사, 정선옹주묘, 여계 모역, 주막거리 객사, 류순정·류홍 부자묘역, 수문장 느티나무, 구로공구상가 등 구로시장과 함께 둘러 볼만한 여러 명소가 있다.

역사문화적인 사적(史跡)이 풍부하고 관광시설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춰서 외부로부터 관광객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충분한 매력을 지녀야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성공할 수 있다. 지역성과 역사성을 고려한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어 찾아가고 즐기고 머무르고 싶은 곳으로 발전하는것이 문화관광형 시장의 궁극적 목표다.

[아키비스트(Archivist)]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前 기자, 칼럼니스트)
김범준 한국교사강사연합회 협동조합 대표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아카이빙(2019)
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 다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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