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화탁지의 음양오행 성격론] 중학교 시절이었던가? ‘브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열풍이었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인가 우주선이 지구의 하늘위에 떠있고 사람의 모습을 한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연구소를 차린다. 하지만 그들은 껍데기만 인간의 모습일 뿐 가죽을 벗겨내면 파충류의 모습이다. 게다가 그들의 피는 녹색이었다. 그 드라마가 아이들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생물 시간에 졸던 아이들에게 파충류의 피는 녹색이라는 강력한 세뇌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만든 이가 의도한 것은 결국 인간과 외계인을 구별하는 도구로 사용된 피의 색이 주는 따뜻함과 차가운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다소 작위적이고 흑백논리로 빠질수 있는 유치함이 충분하지만 그 시절에는 먹혀 들어가는 논리임에는 분명했다.

붉은 피의 색은 열정과 청춘을 상징한다. 따뜻함을 넘어선 강렬함은 인간이 가진 강인한 생존본능과도 맞닿아 있다. 모든 이가 자신의 인생을 뜨겁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생존본능이 약한 생명체는 도태되기 마련이다. 철학자 들뢰즈는 인간을 일컬어 ‘생존기계’라 했다. 생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살아남는 것이 목적인 기계라...여기에는 어떠한 감정과 이성을 배제한 오직 생존이 모든 생명체의 최우선 목표임을 강조하고 있다. 살아남지 못하는 생명체에게 다른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심장이다. 심장이 뛰느냐 아니냐가 그 사람의 생과 사를 구별하는 기준인 것이다. 물론 심장만 뛴다고 뇌가 죽은 사람을 살아있다고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생명체로의 기본인 피가 몸속을 돌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말이다.

심장의 기운은 화의 기운이다. 불이 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태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은 꺼지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섭리이다. 그 불은 나 자신을 태우기도 하지만 나 아닌 다른 것들까지도 불태워버릴수 있기 때문에 늘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도 결국은 그 심장의 기운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함임을 알 수 있다.

어느 작가의 에세이를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힘들게 살아온 인생에서 늘 애정을 갈구하는 자신에게 실망하면서도 또 다시 사랑을 갈구하는, 마치 자신의 열정이 죄인냥 솔직담백하게 털어놓는 글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열정없는 삶이 선량하다 했던가?’라는 물음을 던졌지만 나는 반문을 하고 싶어졌다. 선량을 댓가로 열정을 버리면 그 사람이 과연 살아있다 말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녀는 자신의 열정을 핑계삼아 다른 이를 힘들게 한 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스틸이미지

열정은 무언가를 태운다 했다. 그 무언가가 타인이나 외부로 향할 경우에는 그녀가 걱정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자신의 열정을 태우는 댓가로 타인의 고통을 담보삼는 것은 분명 잘못된 선택이다.

짐 자무쉬의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서는 몇 백년을 살아온 뱀파이어 커플이 등장한다. 영화의 내용보다는 주제가 매력적이다.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피를 담보로 한다는 것은 다소 불쾌하지만, 그들에게 사랑은 지리멸렬할 수 있는 긴 시간을 살아내는 원동력이 된다. 피의 색은 붉다. 상징적으로 열정과 따뜻함을 의미하는 장치이다. 드라마 <브이>에서의 녹색피와는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심장이 뛰어야 하고 그 심장을 열심히 뛰게 하는 것은 결국 열정이다. 누구의 심장이 더 열심히 뛰느냐는 누가 더 열심히 사랑하고 있느냐의 다른 버전인 것이다.

▲ 오경아 비엘티 아케아 대표

[오경아 대표]
건국대 철학과 졸업
전 수능영어강사(번역가)
현 비엘티 아케아 대표
현 교환일기 대표
현 세렌 사주명리 연구소 학술부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