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안중근과 아버지 안 진사를 만나다

-일단 퇴각은 했으나 다음 수습책은 어떻게 세웠습니까.

“잘 훈련된 군사가 없었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로는 경군이나 일본군과 싸워서 이기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동학교도가 아닌 사람도 전투에 경험이 있는 자를 초빙해 군사훈련을 시켰습니다. 주로 장교 경력이 있는 사람을 정중하게 모셔왔지요. 그러던 어느날 정덕현과 우종서라는 사람이 만나자고 요청이 왔습니다. 찾아온 이유를 물었더니 ‘동학군이란 한놈도 쓸 만한 껏이 없는데 그대가 좀 낫다는 말을 한번 보고 싶어왔다.’고 하더군요. 여러 얘기를 나누고 나서 이 두 사람이 몇가지 방책을 제시하더군요. 첫째, 군기를 정숙하되 병졸을 대할 때 절대 경어를 쓰지 말 것. 둘째, 동학당이 총을 가지고 다니면서 곡식이나 돈을 빼앗는 일은 하지 말 것. 셋째, 어진 이를 초빙하는 글을 발포하여 경륜있는 인사를 다수 구할 것. 넷째 전군을 구월산에 모아 훈련할 것. 다섯 째, 재령과 신천 두 고을에 왜놈이 사서 쌓아둔 쌀 수천 석을 몰수하여 구월산 패엽사로 옮겨 군량미로 삼을 것 등이었습니다. 나는 매우 기뻐서 모두 시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전군을 구월산으로 옮길 준비를 하던 어느날 밤 신천 청계동 안 진사라는 사람으로부터 밀사가 욌습니다.”

다음은 김삼웅씨가 쓴 ‘백범 김구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안 진사는 청계동에 의려소(義旅所)룰 두고 산포수 수백명을 모집하여 동학군을 토벌한다는 그 장본이기 때문에 동학군과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창수는 일단 정덕현에게 밀사를 만나보게 했다. 이 사건은 향후 백범의 생애에 큰 전기가 됐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샛별같이 찬연히 빛나는 두 인물, 백범과 안중근 가(家 )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 진사, 안태훈(安泰勳)은 당대에 글 잘하고 글씨 잘 쓰고 지략이 뛰어난 사람으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슬하에 중근, 정근, 공근 등 새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 중근은 나중에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처단한 바로 그 사람이다. 정근과 공근도 항일 독립운동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안태훈의 가문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게 된다.

안태훈은 해주 사람으로 난세를 피해 1980년부터 신천군 청계동에 은거하고 있었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아들 안중근과 함께 의려를 일으켜 동학군을 토벌하여 팔봉부대도 경계할 만큼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때마침 20리 상격하여 회학동과 청계동 군사가 대진하고 있었던 그 때, 동학군 토벌대장인 그가 해주 출신이므로 백범의 집안이나 애기주접으로 명성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안 진사의 밀사는 왜 왔다는 것입니까.

“안 진사는 비밀리에 나를 조사한 뒤 ‘군이 나이 어리지만 대담한 인품을 지난 것을 사랑하며 토벌하지 않을 터이지만 군이 만약 청계를 침범하다가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는 후의에서 밀사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즉시 참모회의를 열어 논의한 결과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밀약을 맺었습니다. ”

-그렇다면 안 지사와 적대관계라는 얘기인데요.

“내가 이끄는 동학군은 양반을 토벌하는 것이고 반면 안 진사가 이끄는 군대는 동학군을 토벌하려는 의병의 성격이었죠. 그당시 동학농민군을 지지하는 백성도 많았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중에는 기득권을 지닌 지배층이나 나라를 생각하면서도 양반지배체제를 부정하는 동학농민군의 새로운 운동 방식에 동조하지 않는 유생층 등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다.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이자 개화사상을 가진 안 지사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안 진사는 내가 무모하게 싸우다 죽으면 아까운 인재를 하나 잃어 버리게 될 것인 즉, 호의로 이 밀사를 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 후에 우리 동학군이 패하자 나는 밀약을 믿고 안 진사에게 가 몸을 의탁했고, 안 진사는 나를 기꺼이 받아주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양반 상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는 큰 계기가 됐습니다.”

-안 진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해주 부중에 10여대나 살아오던 구가의 자제였습니다. 안씨 6형제가 다 문장재사(文章才士)라 할만 합니다. 당시 시객들이 안 진사가 지은 명작 율시들을 외우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안 지사도 종종 나를 청해 스스로 잘 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들려주곤 했습니다.”

다음은 안 진사가 동학당이 창궐할 때 지은 기의 구절이다.

새벽 궁벵이는 살고자 흔적없이 가버리나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부덕민, 『백절불국의 김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2009)
·김삼운, 『백범 김구 평전』 (시대의 창, 2004)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18 개정판)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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