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청나라로 가던 중 뜻밖의 일이 생겼으니 그쪽으로 발길을 재촉했겠네요.

“아닙니다. 주인에게 ‘왜놈들은 우리 조선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의 원수이니 시체를 바다속에 던져서 물고기와 자라들까지 즐겁게 뜯어먹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포고문을 써서 길기 벽에 붙이도록 했습니다. 아울러 주인에게 ‘안악군수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라. 나는 내 집으로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겠다. 왜놈의 칼은 내가 가지고 가겠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고개를 넘어 신천읍에 도착하였는데 그날은 마침 장날이었습니다. 벌써 치하포 소식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치하포 나루에 어떤 장사가 나타나 일본사람을 한 주먹으로 때려죽였대’ 이러쿵 저러쿵 얘기들이 들려왔습니다. 신천 서쪽에 사는 동학당 친구 유해순을 찾아갔습니다. 유씨가 ‘형의 몸에서 피비린내가 나는데 무슨 일이오.’라고 자꾸 캐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왜가리 한 마리 잡아먹었다고 둘러대다가 하도 진실을 말하라고 하기에 대강 얘기했지요.그러더니 빨리 피신하라고 했어요. 나는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해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하게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라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한테 그 일을 말씀드렸겠네요.

“청나라로 떠났던 아들이 다시 돌아왔으니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많았습니다. 치하포 사건에 대해 소상히 말씀드렸지요. 곧 잡으러 올텐데 빨리 피신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피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시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미 실행한 이상 당당하게 법 앞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이 한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이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어버지는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서 하여라’라고 하시면서 더 이상 강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잡혀들어갔겠네요.

“그해 5월11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수십명이 소채찍과 쇠몽둥이를 가지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내무부령 체포장을 보여주고 나를 압송해갔습니다. 가면서 숫자를 세어보니 순검과 사령이 모두 30명이요, 내 몸은 쇠사슬로 여러 겹 동여졌습니다. 몇 사람은 앞뒤에 서서 쇠사슬 끝을 잡았고 그 나머지는 좌우를 나를 애워싸고 갔습니다. 이틀만에 해주 감옥으로 들어갔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해주에 오셔셔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고문이 심했을텐데요.

“사령들이 내 두 발과 두 무릎을 한데 동이고 다리 사이에 붉은 몽둥이 두 개를 들이밀었습니다. 한 놈이 몽둥이 한 개씩을 잡고 좌우를 힘껏 누르니 단번에 뼈가 허영게 들났습니다. 내 왼쪽다리 정강마루에 있는 큰 상처자국이 바로 이때 생긴 것입니다. 고문을 받으면서 기절을 몇 번 했습니다. 깨어날 때마다 나의 체포장에는 내무부 훈령이 찍혀 있는데 여기서 처리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잖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7월초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과 세간살이를 다 팔아가지고 인천이든 서울이든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다니겠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옥바라지를 해주셨습니다.”(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부덕민, 『백절불국의 김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2009)
·김삼운, 『백범 김구 평전』 (시대의 창, 2004)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18 개정판)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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