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백선영의 일상예찬] 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아니, 편지를 비롯해 글이라는 것을 손으로 직접 쓴 일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심지어 학생 신분인 나도 수업시간과 시험기간 외에 연필을 손에 쥘 일이 거의 없다. 평소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손에 필기구를 쥐어야 하는 경우는 무언가를 빨리 적어야 할 때, 해야 할 일을 정리할 때, 서명할 때 정도에 그친다. 그나마도 스마트폰이라는 유용한 도구 덕에 손에 펜 잡을 일이 줄었다. 대부분의 문서 작업, 글 작성을 컴퓨터나 태블릿,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는 요즘 시대에 손글씨를 쓰는 일은 효율성과 실용성이 떨어지는 일이라고 사람들은 여기는 듯하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기기들이 손으로 글씨 쓰는 일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걸까?

편지 얘기를 좀 더 해보기로 하자. 편지의 수신자는 남자친구였다. 어젯밤 말다툼 후 극적인 화해를 하고 감격에 겨워 오랜만에 연필을 잡은 것이다. 평소 손이 타이핑에 익숙하다보니 오랜만에 잡은 연필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한 때 명필이라며 친구들로부터 ‘백석봉’이라는 별명을 들었던 시절이 무색하리만치 삐뚤빼뚤한 글씨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손글씨가 가져다주는 아날로그적 감성에 푹 빠졌다. 분명 타이핑보다는 훨씬 느리지만 천천히, 글자 하나하나에 내 마음을 담아 글을 써내려 가다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차분해진 마음 상태는 더욱 진솔한 얘기를 꺼내는데 도움이 됐고 머리로만 생각했다면 이끌어내지 못했을 생각들까지도 적어낼 수 있었다. 실제로 펜과 종이를 만지는 신체적 행위인 손글씨 쓰기는 아동의 두뇌 발달뿐 아니라 성인의 전반적인 두뇌 자극에도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많이 나왔다.

나는 이어서 손글씨만이 가지는 특색에 눈을 떴는데, 강조하고 싶은 부분의 글씨엔 저절로 힘이 실렸고 필체가 거침이 없었다. 반면 가벼운 농담이나 우스갯소리를 적은 부분에선 자유자재로 표정을 그릴 수도 있었고 나만의 귀여운 글씨체를 적용할 수도 있었다. 몇 번을 지웠다 고쳐 쓴 부분에 지우개 자국이 남아 얼마나 공들여 이 문장을 적었는지, 단어 선택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편지의 마지막 장 글씨는 처음 쓴 글씨에 비해 피곤함도 묻어났다. 편지에 역사성과 개성이 그대로 실려 편지가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문득 예전에 남자친구에게서 받은 편지가 떠올라 찾아 읽고 싶어졌다. 나는 초등학생 이후로 받은 모든 편지들을 내 서랍에 모셔 놓고 있는데 남자친구 편지를 찾다보니 자연스레 다른 편지들에 눈이 갔다. 중학생 때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지들은 세월이 흘러 색이 바랬고 몇몇은 접힌 부분이 찢어져있었다. 몇 개를 읽다보니 당시의 감정과 생각이 오롯이 담긴 그것들이 새삼스레 더욱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쓴 이 손편지도 마찬가지로 남자친구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닐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글은 노트북으로 작성하고 있다. 나 역시 기기가 가져다주는 편리성을 부정할 수 없고 많은 것이 매체화되어가는 현실을 거부할 수 없다. 더욱이 편지는 카톡방으로도 얼마든지 띄울 수 있다. 스마트폰을 통해 쉽게 고치고 빠르고 편리하게 작성할 수 있음에도 연필을 쥐었던 이유는 카톡으로 편지를 작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더 짧을지 몰라도 진심을 전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손편지가 더 짧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앞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나왔다. 기기는 손으로 쓴 글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용도와 목적에 따라 각각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문서 작성을 할 땐 컴퓨터를 쓰는 게 낫지만 지인에게 메모를 남기거나 고마움을 전할 땐 손편지가 낫다. 하지만 확실히 손글씨와 손편지는 진심을 전하는 데 있어서 우위에 있다. 혹시 당신 곁에 소원해졌지만 다시 연락하고 싶은 친구, 혹은 서먹해진 사이를 회복하고 싶은 가족, 혹은 권태기 속에서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길 원하는 연인이 있는가? 그렇다면 ‘타이핑’하지 말고 손편지를 써라. 그것도 연필로.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곡도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는 일은 멋진 일이다. 그 모습에 감동받은 연필의 요정이 마법을 부려 그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해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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