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 사진 출처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김문 작가)

-피난지에서 피어오른 애틋한 러브스토리 같네요. 중경까지는 임시정부를 옮기는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상하이를 떠나면서 여러 곳을 거치게 됩니다. 항주(항저우)와 가흥(자싱)에서 2년, 남경(난징)과 진강(전장)에서 3년, 장사(창사)에서 1년, 광주(광저우)에서 3개월, 유주(류저우)에서 5개월 등을 지낸 뒤 광복이 될 때까지 5년동안 중경(충칭)에서 마지막을 보내지요. 내가 선발대로 중경에 가장 먼저 도착한 후 유쥬에 머물고 있는 동지들을 중경으로 오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 다음 피난통에 두절된 미주 지역의 교포들과 연락하여 경제적 후원을 얻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또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도 시급했습니다. 이때 가슴 아픈 일이 있었는데 임시정부의 마지막 정착지인 중경에서 어머니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어머니는 숨을 거두시면서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하구나.’라고 말씀하셨지요. 또 장남 인이 1945년 3월 중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호흡기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종 3명이 중국에서 잃고 모두 이역에 묻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여러 당이 모여 통일회의를 열었고 광복군을 창설했스빈다.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에 임명하고,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이 원조한 3~4만원 등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1940년 9월 7일 한국광복군 창설식을 갖게 됩니다.”

-광복군은 주로 어떤 임무를 수행토록 했습니까.

“주요 임무는 이렇습니다. 첫째 우리의 분산된 힘을 독립군으로 집결시켜 조선광복투쟁을 전면적으로 전개한다. 두 번째 중국의 항일전쟁에 참가하여 중국 항일부대와 연합하여 왜적을 괴멸한다. 세 번째 적극적으로 국내 민중의 무장 반일 투쟁을 지도한다. 네 번째 정치, 경제, 교육이 균등한 신국가를 건설하는 기본 군대가 된다. 다섯 번째 평화와 정의를 지지하는 세계 각 민족 및 인류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소탕한다 등입니다. 처음에는 대원숫자가 미비했으나 화북지대의 청년학병들이 합세하면서 분위기는 한껏 고조됐습니다. 이후 광복군 제2지대는 미국의 전략사무국(OSS) 합작하여 3개월동안 비밀훈련을 실시하여 조선으로 밀파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막 조선으로 출발할 무렵에 왜적이 항복하는 바람에 비밀작전은 시행도 못해보고 중단이 됐습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습니다. 왜적의 항복으로 임시정부 생활도 마치고 환국할 수밖에 없었지요.”

백범은 중국을 떠나기 하루 전 며느리 안미생을 데리고 양자강을 건너 남안의 화상산으로 갔다. 모친 곽낙원과 아들 김인의 묘소를 찾아 꽃을 바치기 위해서였다. 안미생은 시어머니와 김인의 무덤 앞에서 무릂을 꿇고서 한없이 울었다. 백범은 세 번 큰 절을 올리고 나서 “어머니, 인아! 일본 놈들이 투항을 했습니다. 두 분의 소원이루어졌습니다. 잠시만 쉬고 계십시오.우리가 귀국하면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1948년 6월 백범은 모친의 유언을 받들어 아들 김신을 중국으로 보내 모친과 아내, 아들 인, 그리고 임시정 원로 이동녕, 혁명동지 손일민, 차리석, 민소운 등의 유골을 한국으로 옮겨 이장했다.)

다음은 ‘백범일지’ 뒷부분에 적힌 ‘내가 원하는 나라’에 나오는 내용을 일부 발췌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않는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ㄴ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만 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중략)

앞으로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오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 1947년 샛문 밖에서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부덕민, 『백절불국의 김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2009)
·김삼운, 『백범 김구 평전』 (시대의 창, 2004)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18 개정판)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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