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 사진 출처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김문 작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하는 대화가 ‘누가 어떻고 어떠하더라’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평상적인 일상사에도 그렇고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 또한 그럴 것이다. 작년, 그러니까 2019년에는 적어도 ‘임시정부’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 인물들이 새롭게 등장해 우리들과 새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인물을 거론할 때 도산 안창호를 빼놓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서리이자 내무총장, 구한말 신민회를 조직하고 공화정을 꿈 꾼 계몽운동가, 지역과 좌우 이념을 넘나드는 민족 유일당 운동을 이끌었던 정치인, 또한 수양동우회와 흥사단을 조직하고 점진학교·대성학교·동명학원 등을 설립한 교육자이자 미주 교민들의 생활 운동을 일으킨 인격자…,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이밖에도 많다.

도산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핵심 중의 핵심인 인물이다. 특히 임시정부와 관련해서 도산은 초기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하고 실질적으로 살림을 꾸려나갔던 요인이었다. 동시에 크고 작은 갈등이 존재했던 임시정부를 통합하고자 끝까지 노력했고 국민대표회의 등을 통해 임시정부의 개혁을 주도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그를 빼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3·1운동 100주년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민족의 지도자인 도산을 만날 수 밖에 없었다. 인터뷰는 그를 기리기 위해 1971년에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조성한 도산공원에서 진행됐다. 도산공원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다. 도산의 생애와 사상을 더듬어보는 인터뷰를 진행하기에는 이보다 더 나은 장소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낙망(落望)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공원 곳곳에 서 있는 그가 남긴 명언들을 새긴 어록비를 한창 훑고 있을 때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는 도산의 음성이 들려왔다. 도산의 목소리는 곁에서 본 동료들이 증언한 것처럼 그리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았으며 부드럽지만 비장함을 띠고 있다. 도산은 평소처럼 말끔한 정장을 차린 모습이었다.

이날 마침 ‘보헤미인 랩소디’ 영화를 봤다. 8번째 관람이다. 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아마 난 하루 중 몇시간만 정신 들 거야. 그럴 그때마다 노래를 부르게 해줘. 난 록 스타가 아니라 전설이 될거야.’

프레드 머큐리가 생을 마감하면서 병상에 누워 친구들에게 한 말이다. 영국에는 퀸이 둘이 있다. 하나는 엘리자베스 여왕이고 하나는 밴드 퀸이다. 프레드 머큐리가 밴드 이름을 ‘퀸’으로 정한 이유는 영국의 전설이 되고 싶어서였다. 그 정도의 도전적이고 강인함이 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그랬다. 전설이라고 해도 돼겠다. 왜? 아무도 못한 일을 했으니까.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고난을 겪을 때 용기있는 행동을 한 사람을 우러러 본다. 누굴까?

-오셨습니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제가 늦지는 않았지요.”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여기저기에 새겨 놓았기에 하나하나 읽어보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대단한 사람의 말이라고. 후손들이 한 것이지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하, 뭐든 내세우고 자랑하지 않으려는 성격이셨다고 들었는데 그대로이신 것 같습니다. 바쁘실텐데 흔쾌히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본격적으로 질문을 드리기 전에 오늘 인터뷰 취지를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2019년은 1919년, 그러니까 기미년에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자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진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의 핵심 요인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선생님께 임시정부를 포함해 지난 생애 동안 힘껏 걸어오신 독립운동의 길에 대해 여쭙고 후손들이 가야할 길에 대해서도 조언을 들었으면 합니다. 선생님의 겸양지덕은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오늘만큼은 사양마시고 스스로의 삶과 생각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걸어온 길이 이 기사를 읽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흔히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아니니 최대한 충실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도산의 답변은 모두 생전 그의 글과 연설에서 발췌하여 문맥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도산은 열정적인 연설가였지만 편지 글과 일기 외에 글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만 46세를 맞은 192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해 작성한 뒤 ‘동아일보’와 잡지 ‘동광’에 연재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에 실린 연설문 또는 연설문 개요, 동지 및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활용해 살을 붙였다. 도산의 삶의 여정에 관한 내용은 주요한 선생이 정리한 ‘안도산 전서(증보판)’(흥사단출판부, 2015)의 전기 부분과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현암사, 2013)를 주로 참고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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