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선생님의 해외 생활을 말하자면 가족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스물네 살에 이혜련 여사와 결혼을 하셨고 슬하에 2남2녀를 두셨습니다. 그런데 결혼생활 총 36년 동안 가족과 같이 생활을 하신 것은 12년 정도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가족 분들은 미국에 계셨지만 선생님께서는 국내와 하와이, 상해, 만주 심지어 남미 지역 등을 다니시며 활동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그리우셨겠지요.

“어찌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고국에 왔다가 고국이 망하는 것을 보고는 나 혼자 잘살겠다고 고국을 버리고 훌쩍 미국의 가족 곁으로 돌아가는 일은 인정상 차마 못할 일이지요. 저의 가족들도 사욕이 아니라 큰 의리를 생각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가족들이 자주 보고 싶으셨겠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짬이 나서 편지를 쓸 때면 생각이 더 많아지곤 했었지요. 어떨 때는 아내와 아들 필립, 필선, 딸 수산, 수라를 모두 다 제가 있는 곳으로 데려와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사정이 허락되지 않았지요. 제가 고생한 것은 별달리 신경 쓸 것도 안 되지만 아내가 저를 위해 십 수 년 동안 고생을 한 것을 생각하며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자식들에게 연필 한 자루도 사줄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못난 아비가 타국에서 독립 운동을 한다고 장남에게 매년 400달러씩 송금까지 받아 생활을 했으니 그 고마움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독립운동가의 길이라는 게 다들 그랬지 않았습니까. 특히 선생님께서는 지도자 위치에 계셨으니 더더욱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 힘드셨겠지요.

“가족들도 그렇게 이해했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도산의 답변은 모두 생전 그의 글과 연설에서 발췌하여 문맥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도산은 열정적인 연설가였지만 편지 글과 일기 외에 글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만 46세를 맞은 192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해 작성한 뒤 ‘동아일보’와 잡지 ‘동광’에 연재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에 실린 연설문 또는 연설문 개요, 동지 및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활용해 살을 붙였다. 도산의 삶의 여정에 관한 내용은 주요한 선생이 정리한 ‘안도산 전서(증보판)’(흥사단출판부, 2015)의 전기 부분과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현암사, 2013)를 주로 참고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