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를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갈무리.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칸국제영화제(프랑스), 베니스국제영화제(이탈리아)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분류되는 베를린국제영화제(독일)가 내년부터 주연상을 성별 구분 없이 통합해 시상한다고 발표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는 24일(현지 시각) “2021년 2월 11일부터 열흘간 오프라인으로 열리는 제71회부터 배우 부문 은곰상(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남자 배우와 여자 배우를 구분하지 않고 젠더 중립적으로 통합해 주연상을 시상하기로 결정했다”라고 선언한 것.

이 영화제 역사상 첫 여성 집행위원장을 맡은 마리에트 리센벡은 이러한 결정에 대해 “이번 결정은 영화 산업계의 젠더 의식을 높이는 신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51년 독일의 통일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시작돼 매년 2월 중순에 열리는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 중에서도 가장 예술적인 작품을 발굴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으로 정평이 높다.

또한 장선우와 박찬욱 감독이 수상했던 알프레드 바우어상도 폐지한다. 이 상은 영화제 초대 집행위원장이자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 기법을 정착시킨 알프레드 바우어 촬영 감독을 기리기 위해 예술적으로 특별한 혁신을 이룩한 작품에 수여하는 특별상으로 제정했지만 바우어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논란이 지속되자 결국 폐지를 결정했다.

이원론 혹은 이항대립은 인간의 이념을 지배하는 가장 쉽고도 흔한 사상 중 하나다. 조용필의 ‘여와 남’은 ‘지구 위의 반은 남자, 지구 위의 반은 여자’라고 노래한다. 세상은 온통 대립항으로 이뤄져 있다. 선과 악, 흑과 백, 청과 적, 명과 암 등 이루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기를 좋아한다.

굳이 심신이원론을 펼친 데카르트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이항대립투성이다. 한때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사의 연말 가수 대상 시상식은 남자 가수 팀과 여자 가수 팀으로 나눠 대결을 시킴으로써 연말 축제 분위기를 띄우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유치하다. 남자와 여자가 굳이 성별 구분으로 다툴 성격의 차이인가?

플라톤은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빌려 애초에 인간에겐 남자, 여자, 남녀추니의 세 가지 성별이 있었음을 알린다. 그런데 모든 능력이 신에 가까운 남녀추니들이 주제넘게 오만방자해지자 노한 제우스가 둘을 갈라버림에 따라 인간은 평생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 운명을 갖게 됐다는 것.

물론 이는 그리스신화에 근거한 ‘신화’다. 남녀의 성기를 함께 지닌 생물학적인 남녀추니가 실재하는 현실과 칼 구스타프 융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소수성애자가 엄연히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신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자명하다.

따라서 이번 베를린의 결정은 지극히 당연하다. 물론 일각에선 ‘젠더 중립’이라는 포장으로 여성 배우의 기회가 박탈당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긴 하지만 그런 발상 자체가 남녀차별의 발로이지는 않을지 진중한 숙고가 필요해 보인다.

분명히 남녀의 차이는 있다. 그러기에 성별 구분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스포츠에서 남녀의 구분을 없앤다면 그건 분명 성차별이고 독과점이다. 하지만 연기력은 남녀의 차이가 거의, 아니 전혀 없다. 심지어 아역 배우 중에서 웬만한 중년 배우 뺨칠 만한 연기력을 펼치는 이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런 우려는 성별에 따른 걱정이 아니라 아직도 사회 전반에 걸쳐 잔재한 선입견적 남성우월주의의 잔재가 개입한 기우가 아닐까?

젠더를 초월할 스포츠는 거의 없다. 골프만 해도 프로의 경우 남자는 드라이버 비거리가 300야드, 여자는 250야드 안팎이다. 여기서 벌써 한 타 차이가 난다. 비교적 피지컬이 실력과 덜 엮이는 당구만 해도 남녀의 차이는 구분된다.

여자 당구 3쿠션의 강자 테레사 클롬펜하우어(네덜란드)는 지난해 ‘2019 서울 서바이벌 3쿠션 마스터스’에 출전해 남자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긴 했지만 일종의 흥행적 쇼비즈니스였다. 아무리 그녀가 웬만한 남자 못지않은 피지컬의 소유자라고 해도 육체적으로 남자 프로를 극복하는 데엔 한계가 엄존한다.

하지만 연기, 노래, 작곡, 연주, 미술 등의 예술은 그런 차이가 없다. 지성과 마찬가지다. 외려 감수성 측면에서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여자가 연기력이라면 약간 유리하지 않을까? 타고난 선험적 감성과 전의식에 더한 후천적 노력이 연기 솜씨를 완성하는 것이지 성별이 결정하진 않는다.

단, 영화의 상업성이란 측면에서 남자배우가 여자보다 더 돋보일 가능성은 분명히 항존한다. 그런데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예술성으로 가늠하니 특별한 문제는 없을 듯하다.

독일은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지구촌에 큰 흉터를 남겼지만 독일 국민 역시 상처를 입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전후 그들이 가장 우려해 배척한 것이 극우주의였다.

나치즘은 지구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독일인에겐 영원한 콤플렉스고, 다른 국민에겐 고통일 것이며, 공통적으로 교훈일 것이다. 그래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폐지한 건 전후 처리 문제에 기준할 때 백 번 잘한 일이다. 아니 만시지감이 크다.

모든 나라와 민족에겐 각자의 강점이 있기 마련인데 독일은 철학에서 특히 강했다. 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일 천재로 마르틴 하이데거와 프리드리히 니체가 있다. 워낙 유명한 두 사람은 그 명성만큼 사상사상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문제는 하이데거가 명명백백하게 나치에 부역했고, 나치는 니체를 선전에 활용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인간의 실존에 대해 많은 깨우침을 줬고, 저서 ‘존재와 시간’은 엄청나게 읽힌 만큼 심오한 사상을 설파한 것은 사실이다.

단, 철학자 하이데거가 아니라 나치에 동조한 정치가 하이데거에 대한 항소심과 더불어 과연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가 나치를 향한 것인지, 정녕 위선과 겸손을 깨뜨리자는 망치의 철학인지에 대한 재평가는 필요할 듯하다. 이번 베를린의 반가운 소식이 주는 숙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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