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내달 개봉될 ‘메피스토’(김동후 감독)는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괴테의 ‘파우스트’를 비튼다. 비극인 듯하다 스릴러로, 액션으로, 다시 판타지 비극으로 변주된다. 권투 라이트급 아시아 챔피언이었던 태석은 길거리에서 한 여자가 곤경에 처한 걸 보고 도와줬다가 오히려 실형을 살고 막 출소했다.

연인 수연의 집에서 그녀의 동생 지연과 함께 살며 재기를 꿈꾸지만 박탈당한 선수 자격 회복이 쉽지 않다. 미술학원 교사인 수연은 학원의 경영난으로 해고되고 태석의 보석금 마련을 위해 빌린 사채 빚에 쪼들리고 있다. 우상애셋 박 대리란 자가 도움이 필요할 때 찾아오라고 명함을 건넨다.

여고생 지연은 비참한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 타인의 SNS에서 퍼 온 사진을 편집해 자신의 SNS에 올리며 부유한 척한다. 그녀는 채팅으로 원조교제 상대를 유인해 여관에 간 뒤 남자가 샤워하는 사이에 지갑을 들고 도망가는 수법으로 용돈을 벌고 있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친구인 자경일 뿐.

지연이 중년 남성을 만나 여관에 들어가고 우연히 그녀를 발견한 수연이 뒤따라가며 태석에게 도움을 청한다. 남자는 방금 사우나를 했다며 막무가내로 관계를 맺으려 하고, 때마침 수연과 태석이 들이닥쳐 구한다. 집에 돌아와 수연이 지연의 가방을 뒤지자 남자의 지갑과 경찰 신분증이 나온다.

CCTV를 확보한 형사들이 지연의 학교에 찾아오고 조만간 수연의 집에까지 들이닥칠 위기에 처하자 수연은 태석과 함께 우상애셋을 방문한다. 박 대리는 태석에게 술, 담배만 안 하면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태석은 자신의 오른팔을 담보로 내걸자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데.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도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회의에 빠진 늙은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담보로 젊음과 쾌락을 얻지만 결국 세속적인 욕망이 허황된 것임을 깨닫고 스스로 죽음을 부른다. 메피스토가 득의양양하게 그의 영혼을 접수하려는 찰나 신이 구원해 준다.

‘파우스트’는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콘스탄틴’의 결말은 이를 참조한 듯하다. 니체가 말한 지배자도덕의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이자 노예도덕의 ‘선악의 피안’에 사는 자다. 희생의 인류애다. 그러나 ‘메피스토’는 종교는 인간을 구원하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듯 대척점에서 서늘하게 경고한다.

중간까진 약간 지루하다. 독립영화치곤 별로 개성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각종 독립영화, 심지어는 ‘기생충’에서까지 봤던,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숱하게 접했거나 직접 경험한 빈곤층의 피곤한 얘기가 주저리주저리 펼쳐진다. 하지만 우상애셋에서 태석이 막노동 동료인 영복을 보면서부터 달라진다.

건설 현장의 가건물 휴게실 안에선 매일 인부들이 화투를 즐긴다. 그런데 영복은 우상애셋에 다녀온 이후 판돈을 긁어모은다. 그리곤 신나게 술과 담배를 즐기더니 어이없게도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는다. 마치 금연과 금주의 캠페인 같은 이 영화가 집중하는 지점은 약속의 중요성과 진정한 우정이다.

태석은 곤경에 빠진 한 여인을 구해주려다 외려 폭행죄로 실형을 살았다. “용감한 시민상을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라는 그의 푸념엔 이 사회의 부조리가 담겨있다. 우상애셋에 다녀온 뒤 수연은 예전의 학원에 재취업한다. 경쟁 학원의 원생 한 명이 죽자 나머지 원생들이 수연의 학원으로 옮긴 것.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 용감한 시민은 감옥에 가고 상대방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세상. 선수 자격을 회복할 기회를 잡은 태석은 마지막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불량학생들이 중학생의 금품을 빼앗는 걸 그냥 지나치지 못해 결국 지각함으로써 불합격한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정의는 멀다.

박 대리는 수연에게 “인생은 한 치 앞을 몰라. 고난과 역경은 불시에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중요한 게 약속과 우정이다. 태석은 권투선수다. 당연히 술과 담배를 멀리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참지 못해 다시 입에 대고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우상애셋은 다단계회사라며 자기합리화를 한다.

선배는 “한 무당이 화재를 예언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자 직접 방화를 했대”라고 무당을 예로 그의 합리주의를 부추긴다. 그건 약속이 아니라 케케묵은 사이비 연금술일 뿐이다. 약속은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한도 내에서 선언돼야 하고, 그래서 반드시 실천돼야 하는 것이지 주술이나 종교와 다르다.

지연은 자경에게 아빠가 런던에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자경이 런던이 뭐냐고 묻자 영국의 수도라고 답한다. 자경은 자기 아빠 이름이 영국이라고 응수한다. 자경은 지연의 허세가 거짓인 걸 알고도 진심으로 대한다. 나중에 지연의 찢어지게 가난하고, 아버지도 없다는 고백을 듣고도 변함없이 대한다.

그렇게 자경이 우정을 지키는 건 지연이 악의적으로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고, 자신에게만큼은 진심으로 대해줬기 때문이다. 그게 우정이다. 친구의 기준은 그의 외형이나 환경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끈끈한 정과 믿음이라는, 매우 당연하지만 비현실적인 메시지. 아파트 평수로 친구를 나누는 시대다.

파우스트는 ‘두 개의 영혼’의 투쟁으로 인해 고뇌했고, 수연은 ‘악마와 거래하지 않는 이상 이런 작품 안 나온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구한말 여류 화가 지영선의 ‘소유’에 집착한다. 인트로의 수연의 ‘6번째 만남’이란 내레이션이 반전의 키다. 독립영화치곤 후반부에 펼쳐지는 다원 장르적 재미가 쫄깃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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