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건축공학자 존(제라드 버틀러)은 앨리슨(모레나 바카린)과의 사이에 7살 아들 네이슨이 있는데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났다 아내의 배려로 재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 시작은 이웃과의 홈 파티. 열심히 음식을 준비 중이던 존의 휴대전화로 대통령과 국토안보부의 비상 대피 메시지가 온다.

다른 은하계에서 생성된 혜성 클라크의 파편들이 지구를 향해 돌진 중인데 6500만 년 전 공룡을 멸종시켰던 행성보다 더 큰 파편이 48시간 뒤에 서유럽에 떨어질 급박한 상황인 것. 그렇게 되면 지구 생명체의 75%가 사라진다. 미국은 직업별로 주요 인물들만 그린란드의 벙커로 대피시키려는 것.

존의 가족은 국가가 지정한 공항에 도착해 생명줄과 같은 신분 확인 팔찌를 부착한 채 탑승하려 하나 소아당뇨병을 앓는 네이슨의 약을 실수로 차에 빠뜨린 것을 확인한 뒤 존이 다시 차로 돌아간다. 존이 궁금한 앨리슨이 군인에게 그들의 사정을 설명하자 만성질환자는 태울 수 없다며 쫓아낸다.

약을 챙겨 돌아온 존은 비행기에 승선한 뒤 한 승객으로부터 만성질환자 배제 내용을 듣고 하선한다. 그때 대피자에 선정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폭도로 변해 공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비행기 폭발이 일어난다. 앨리슨은 차에 아버지 집으로 오라는 메모를 남기고 네이슨과 노부부의 차를 얻어 탄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의 태도가 돌변하더니 앨리슨을 차에서 끌어낸 뒤 팔찌를 빼앗고 제이슨을 태운 채 그대로 달아난다. 메모를 본 존도 북쪽으로 이동하는 트럭을 얻어 탄다. 마음씨 좋은 흑인 청년이 그들은 캐나다로 이동한 뒤 거기서 아는 파일럿을 만나 비행기로 그린란드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백인 2명이 존의 팔찌를 보더니 강제로 빼앗으려 폭력을 행사하고 그 바람에 트럭이 전복된다. 백인 2명이 망치를 들고 존에게 덤비고 존은 망치를 빼앗아 방어하다 실수로 한 명을 죽인다. 노부부는 제이슨의 부모로 위장해 대피소 진입을 시도하지만 제이슨이 사실을 폭로하면서 실패하는데.

‘그린랜드’(릭 로먼 워 감독)는 지난 모든 재난 영화를 잊어도 될 만큼 엄청난 공포를 준다. 지구가 6500만 년 전으로 되돌아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는 시나리오와 마치 군사력 우위의 적국으로부터 맹폭을 당하는 듯한 혜성 파편의 소나기는 처참하지만 장관, 지옥도 같지만 화려한 비주얼이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성서의 ‘노아의 방주’는 유대교나 기독교의 창작물이 아닌, 최소한 1만 5000년 전부터 메소포타미아, 펠로폰네소스반도, 이집트 등에서 전승된 ‘신의 심판’의 신화다. 인간의 야욕과 교만이 하늘을 찌르자 신이 대홍수와 불 폭탄 등으로 심판했다는 ‘전설의 고향’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는 지우수드라(수메르)와 우트나피슈팀(아카드)이 등장하는데 내용이 ‘노아의 방주’와 똑같은 대홍수 심판이다. 이명동인인 이 지혜로운 현자는 대재앙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인류의 명맥을 잇는데 새소리를 듣고 새를 보면서 생존을 확인한다. 이 작품은 기와 결이 그와 똑같다.

클라크가 48시간 뒤에 떨어진다는 뉴스가 들리자 전 세계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사재기는 약과고, 공권력의 사실상의 무장해제로 치안이 무너져 약탈과 폭동 등이 횡행한다. 대피소로 이동하려는 존의 차를 이웃이 막고 제발 어린 딸만이라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해도 그는 무시한 채 그냥 질주한다.

인간의 이기심이다. 사람들이 멸망의 전조에 공포에 떨다 못해 미치광이가 돼갈 때 한 건물 옥상에선 부유한 젊은이들이 혜성의 폭발을 구경하며 술잔치를 벌인다. 이 디스토피아적인 극과 극의 광란과 광기는 신의 심판을 정당화하는 한편 인류의 잃어버린 애타심, 동정심, 협동심, 도덕을 촉구한다.

이제 7살인 제이슨이 당뇨병에 걸려 인슐린 펌프를 차고 살아야 한다는 설정은 그 연장선이다. 인류의 환경 파괴는 당장은 편리함을 제공해 줄지 몰라도 결국은 인류의 멸절을 가져온다는 경고다. 존이 네이슨의 이웃 소녀를 안 태워 준 건 공항에서 군인들에 의해 탑승이 저지될 걸 알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인재들만 대피자로 선발했다. 여기서 골치 아픈 인식론이 대두된다. 우수한 인재들만 사람인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무작위로 대피시킨다? 그건 대홍수를 일으킨 신의 의도와 엄발난다. 만약 열등인자도 살아남아 번식한다면 대홍수는 재발이 필수적이다.

존을 돕는 이가 흑인, 해치려는 이는 백인이고, 앨리슨을 해치려는 이가 백인, 돕는 이는 히스패닉인 설정 역시 의미심장하다. 백인을 죽인 존은 그 손이 더러워 미친 듯이 씻어낸 뒤 그 손으로 혜성 파편으로 불이 붙은 승용차 안에 갇힌 운전자를 구해준다. 불을 통한 자기정화 의식이 노골적이다.

미국 내 최대 교파인 침례교 미장센은 감독의 종교일 수도, 퓨리턴의 한 지파로서 각 교회의 독립과,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을 강조한 개혁 정신을 부르대는 것일 수도 있다. 존과 앨리슨은 상처한 뒤 혼자 사는 아버지에게 함께 대피할 것을 애원하지만 “오늘 죽나 10년 뒤 죽나 같다”며 잔류한다.

할리우드 모든 영화들이 그렇듯 가족의 소중함이 주춧돌을 이루지만 ‘아이를 낳으면 위탁 기관에 보내 모든 어른이 부모가 되도록 해야 한다’던 플라톤 냄새도 풍긴다. 이타주의에 근거한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도 엿보인다. 인간의 적은 인간이라는 부인하고 싶은 현실이 가장 큰 공포다. 2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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