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종필 감독)은 김영삼 정부가 ‘국제화 시대’를 외치던 1995년 을지로에 사무실이 있는 삼진전자를 배경으로 얘기가 펼쳐진다. 감독은 당시 실제로 있었던 상고 출신 고졸 사원들을 위한 토익반과 공장의 폐수 유출 사건이라는 두 축을 베이스 삼아 시나리오를 꾸몄다.

실무 능력은 뛰어나지만 현실은 커피 타는 업무가 가장 중요한 생산관리3부 이자영(고아성), 비서실 출신 마케팅부 ‘돌직구’ 정유나(이솜),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 출신이지만 회사에선 가짜 영수증 꾸미기의 달인인 회계부 심보람(박혜수)은 입사 8년 차 여상 출신 동기라 매일 붙어다니는 단짝이다.

대졸 사원들에게 밀려나는 처지라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허드렛일만 하던 그녀들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회사가 토익 600점을 넘으면 고졸자도 대리로 승진시켜 준다며 새벽 토익반을 개설한 것. 회장은 아들 태영을 본사 상무로 발령 내고, 미국에서 온 전문 경영인 빌리를 사장 자리에 앉힌다.

자영은 상무의 짐을 챙겨주라는 명을 받고 금붕어의 처리를 묻자 그냥 버리라는 답을 듣는다. 마침 옥주의 공장에 가는 길이었던 그녀는 공장 근처 강에 방생하려다가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 걸 목도한다. 공장에서 오폐수를 불법으로 대량 방류한 걸 두 눈으로 확인한 그녀는 과장에게 보고한다.

회사는 미국의 전문가에게 확인 요청해 페놀 방류 수치가 안전 지수인 3 이하인 보고서를 팩시밀리로 받는다. 그러나 머리를 맞대고 모인 세 친구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치라며 신림동 S대를 찾아가 기준치보다 무려 100배 이상 방류된 걸 확인한다. 게다가 마을 주민들의 피해까지 접수되는데.

시나리오상의 약간의 허술한 연결과 의욕이 앞선 다소 과장된 연출을 제외하곤 재미, 교훈, 메시지, 감동 등이 넘치는 꼭 필요한 영화다. 크게 ‘코미디-미스터리-반전 드라마’로 전개되는 형식적 구조는 한 작품 안에서 세 개의 장르를 즐길 수 있다는 큰 장점이다. 특히 스피디한 초반이 깔끔하다.

주인공들의 전사(前事)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데 이는 감독의 연출 솜씨에 기인하는 한편 세 주인공의 탄탄한 연기력이 완성한 것이다. 시작은 학력에 의한 차별이지만 얘기가 흘러가다 보면 IMF를 앞둔 위기 상황에서의 글로벌 기업 사냥꾼과 대기업의 환경 파괴가 대두된다.

자영은 그야말로 만능의 척척박사다. 부장과 과장은 그녀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면서도 정작 중요한 업무에서 막히면 그녀를 찾는다. 그건 후배지만 대졸이라 대리로 승진한 동수도 마찬가지. 유나는 부서원들이 회의할 때 간식을 보급하는 게 ‘보직’인데 대졸 조 대리에게 번번이 아이디어를 빼앗긴다.

보람은 그야말로 삼진그룹의 피타고라스다. 추리력과 응용력을 활용한 기하학은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실력. 그런 그녀들이 하는 건 대졸보다 일찍 출근해 청소하고, 대졸자들의 취향대로 커피를 타는 일이라니! 게다가 유나는 외모가 뛰어나고 비서실 출신이란 이유로 사원들에게 꽃뱀으로 불리기도.

그녀들은 회사가 페놀 수치를 속여 옥주 마을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작물이 오염되는 걸 눈으로 확인한다. 자영은 마을의 여고생으로부터 “공부 잘하셨나 봐요. 삼진그룹에 다니고”라는 말을 듣고 “열심히는 했죠”라고 답한다. 그녀들이 여상에 진학한 건 대학 갈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는 얘기.

그녀들은 토익반의 고졸 동료들에게 회사가 페놀 수치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 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세상에 폭로할 방법을 모색한다. 보람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회계부 봉 부장이 정년퇴직한다. 그는 암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문병 온 보람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까? 페놀 방류를 지시한 최종 책임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그의 오른팔은? 봉 부장의 “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잖아”라는 자조 섞인 대사에서 자본주의 체제 속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자기주도적인 페미니즘이 돋보인다.

자영이 찾은 S대 캠퍼스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대자보가 걸려있다. 한때 유행했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와 같은 맥락의 테제다. 기업은 성적순으로 사원을 선발하지만 그 성적이 업무 능력과 직결되진 않는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주특기와 개성이 있기에 그 활용 방법이 능력인 것.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인권을 부르댄다. 삼진의 고졸자들은 대졸자들이 꺼리는 청소와 잔심부름도 잘하지만 그들 소속 부서의 업무에도 능수능란하다. 물론 모든 고졸자와 전 회사에 그게 적용되진 않겠지만 최소한 그런 고졸자의 존재 가능성은 충분하다.

마르크스가 평생 생각한 두 주제는 ‘인간 소외와 구원에의 기대’였다. 그는 소외를 산업 노동에서 자아실현이 결여된 것으로 봤다. 비록 무신론자였지만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을 기독교로부터, 소외 개념을 헤겔에게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자아실현의 기회가 영어라는 것부터 블랙코미디다.

세 주인공은 마르크스가 얘기한 ‘물질적 생산능력’ 중 자연 자원을 제외한 기술과 인적 자원에서 절대 뒤지지 않는다. 다만 ‘생산관계’에서의 노동 조직법에 기준해 학력이 미달일 따름이다. 그걸 뒤집는 막판의 반전이 통쾌해 시원한 맥주 한잔이 절로 생각나는 사회 고발 코미디다. 이달 중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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