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신수식의 정치학 박사의 세상읽기] 오늘은 2020년 10월 26일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위기의 시대에 10월 26일을 맞아 역사 속의 중요한 사건을 통해 우리가 역경을 넘어 용기와 희망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고자 한다.

▲ 사진 출처=픽사베이

첫째는 지금으로부터 427년 전인 1597년 10월 26일에 있었던 명량대첩이다. 1592년 5월 23일 대규모 왜군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에서 국토가 유린이 되고 백성들이 도륙되는 암담한 풍전등화의 국난 상황에서 칠천량해전의 완패는 전세가 완전히 일본으로 기우러진 암울한 상황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1597년 10월 26일(음력 1597년 9월16일) 명량대첩은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긴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고, 이후 일본 수군은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 전쟁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고 나라를 구하는 역사적 의미의 승리였다.

둘째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이다. 안중군 의사가 일제강제점령으로 조선을 유린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장본인인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 하얼빈에서 총으로 저격하여 암살한 위대한 의거였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의 군인이며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로서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 듣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해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에서,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으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이 실패하게 되고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해 암살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동양평화의 기초를 이루는 삼국의 독립을 해쳐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자이므로 처단한 것이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일본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보전하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하얼빈 의거는 한국만이 아닌 동양과 세계의 위대한 의거였다.

▲ 사진 출처=픽사베이

셋째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에 걸친 청산리 대첩이다. 1920년 10월 21일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 전투 등 6일간에 걸친 일련의 전투이며 1920년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을 침입한 일제의 대규모 병력에 맞서 독립군 연합 부대는 3개 연대로 전열을 재정비하여 홍범도는 제1연대장으로 대한 독립군과 국민회, 의군단, 한민회, 의민단, 신민단, 광복단 소속의 연합 부대를 지휘하고, 김좌진은 제2연대장으로 북로 군정서를 지휘하였으며, 최진동은 군무 도독부의 지휘를 맡았다.

10월 21일 아침 김좌진의 부대가 백운평 계곡에서 적의 선발대 200여 명을 물리쳤으며, 같은 날 오후 홍범도가 이끄는 연합 부대가 완루구에서 추격하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400여 명을 사살하였다. 10월 22일에는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가 연합하여 어랑촌 계곡에서 항공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을 맞아 약 1천 명가량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낸 전투는 10월 26일 일본군의 퇴각으로 끝이 났다. 청산리 대첩의 승리는 1910년 국치 이후 간도를 중심으로 한 남북 만주와 노령 연해주 등지의 국외 한인사회에서 경주한 독립전쟁론의 결실이었다. 국치 후 국내외 민족운동자들은 일제로부터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국외 각지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을 양성함으로써 언젠가 적절한 시기가 왔을 때 일제와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독립전쟁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독립을 향한 굳은 신념과 처절한 노력이 3·1운동을 계기로 봉오동 승첩과 청산리 대첩 등 독립전쟁으로 일시에 표출된 것이다. 동시에 이와 같은 독립군의 독립전쟁은 3·1운동에서 보여준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계승해 일제 침략세력으로부터 한민족이 독립할 수 있다는 민족의 자주독립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쾌거였던 것이다

▲ 사진 출처=픽사베이

넷째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한 독재자 박정희 암살이다. 10·26 박정희 암살사건(朴正煕暗殺事件)은 1979년 10월 26일에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함께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한 사건이다. 3선 개헌과 유신헌법으로 종신 독재권력의 화신이 된 박정희에 대한 암살은 여러 가지 설이 있긴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김재규 본인의 말대로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싶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졌으며,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어 진정한 민주화의 길로 가는 데는 실패하게 되었으나 10·26사태 자체는 민주화를 요구하였던 부마사태로 촉발되었고 보다 장기적으로는 유신체제의 붕괴와 군부독재 종식의 한 계기가 되었다는 차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신수식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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