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2000년 4월 4일 오후 5시께 서울 망우1동 염광아파트에 살던 5살 소녀 최준원은 제집처럼 드나들던 친구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지만 집 앞 놀이터 부근에서 사라졌다. 이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목이 실종이 아니라 ‘증발’(김성민 감독)인 이유는 그녀의 가족에 포커스를 맞췄기 때문이다.

이영애 주연의 ‘나를 찾아줘’(김승우 감독, 2019)는 실종 아들을 6년째 찾아 헤매는 엄마의 얘기를 그린 픽션이지만 ‘증발’은 실화라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피붙이를 잃은 가족의 고통과 상실감 이상으로 큰 죄책감에 주목하면서 실종 아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국가적 장치를 고민하자고 외친다.

준원은 3살 위의 언니 준선과 5살 아래의 동생 준현, 그리고 부모와 함께 넉넉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행복하게 잘 살았다. 제 할 말 다 할 줄 아는 똑 부러지는 성격의 준원을 잃은 아버지 용진은 모든 걸 팽개친 채 준원을 찾는 데 주력한다. 그러는 동안 아내는 병약해졌고, 결국 가족을 떠났다.

이 작품은 용진으로 시작돼 준선으로 옮겨가더니 준원의 엄마로 매조진다. 외형적으로 준원의 실종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행동주의자는 용진이다. 스키너는 조작행동에 더 무게를 뒀지만 용진은 반응행동 쪽이다. 그건 ‘여우와 포도’ 같은 자기보호본능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원초적 본능이다.

준원의 실종 때 준선의 나이는 10살. 초등학교 4학년이면 아직 어린이지만 웬만한 건 알 나이다. 만으로 한 살이 됐거나 아직 그 전이었을 준현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나름대로 밝게 성장했다. 최소한 스크린 속 중고생의 준현은 그렇다. 하지만 동생의 실종으로 인해 무너진 가정을 본 준선은 다르다.

그녀의 생활은 단절이다. 유학도 다녀왔고, 바리스타를 꿈꾸는 희망도 있지만 현실은 염광아파트의 허름한 관리실의 일당 3만 원짜리 ‘알바’다. 문제는 직업이 아니라 정서다. 평소 어두운 방 안에서 온종일 휴대전화를 만지거나 컴퓨터게임을 하더니 뜬금없이 한밤에 동네 산책에 나서는 정서 불안이다.

그녀는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뇌까린다.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 여길 떠나고 싶다는 뜻이다. ‘여기’는 과연 염광아파트일까, 현세일까? 그녀는 심리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상실과 단절을 떠안았다. 하루아침에 동생을 잃은 것도 힘든데 보호자인 엄마는 혼이 빠졌고, 아빠는 더욱 밖으로만 돌았다.

그녀는 “평소 아빠는 가족과의 시간을 안 가졌다. 아빠는 좀 벌받는 것”이라고 읊조린다. 준원의 실종 후 준선에겐 부모의 애정과 관심이 더욱 절실했지만 엄마는 희망의 끈을 놓쳤고, 아빠는 그 끈을 찾아 밖으로만 헤맸다. ‘절망은 마약’이란 잠언을 써놓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지만 희망은 멀다.

준원의 엄마는 “세상은 흐르고 있는데 우리 가족은 각자의 시간 안에 갇혀있다”고 독백한다. 준원이 사라진 지 올해로 20년이지만 준현을 제외한 나머지는 여전히 2000년이란 시간적 공간 안에 고여 있다. 정상적 시간의 배열은 과거 공간의 부패로 이뤄지는데 썩지 않고 유령처럼 배회하는 것.

미래는 시간과의 이인삼각 행보로써 적극적으로 맞을 때 밝지만 그녀처럼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면’ 어두울 뿐만 아니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녀는 타임 루프에 빠졌고, 준선은 실존주의적 존재론이 절실하다. 용진은 그 전에는 가정에 소홀했을지도 모르지만 준원의 실종 후 완벽한 가장이다.

다큐멘터리지만 꽤 다층적인 연출이 개입됐다. 개별자들의 심리 상태 묘사가 저변인데 결국 감독이 주목하는 곳은 준원이라기보다는 그녀를 안타까워하고, 죄악감에 시달리는 부모와 같은 심정이면서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뇌하는 준선인 듯하다. 절망에 침윤해가는 미몽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엄마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말한다. 가족이 실종 아동을 찾아서 함께 살고 싶은 소망은 사치라며 그보다 생사 확인이 더 절실하다는 이 말속에 이미 가족의 삶은 망가졌다는 게 담겨있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가는 염광아파트의 마지막 시퀀스는 통증일까, 초극일까? 1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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