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애비규환’(최하나 감독)은 심한 참상이라는 뜻의 아비규환에 아버지라는 애비로 변전한 말장난이라 살짝 가벼운 느낌이 들지만 외형은 매우 코믹하면서도 내용은 의미심장한 블랙 코미디의 묵직한 심도를 뽐낸다. 21살 대학생 토일(정수정)은 가정교습을 해 주는 고3 호훈의 아이를 임신한다.

대구에서 남편과 이혼한 엄마는 토일이 6살 때 지금의 남편과 재혼해 서울로 올라왔다. 한문 선생인 계부는 토일을 친딸 이상으로 애지중지 키웠다. 토일은 임신 5개월이 돼 더 이상 부른 배를 숨길 수 없자 호훈을 데리고 부모 앞에 앉아 결혼하겠노라 선언하고 엄마가 화를 내자 짐을 싸 가출한다.

그녀는 대구 외조부모 집에 짐을 푼 뒤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안 나는 친부를 찾겠다고 시내 학교를 뒤진다. 그녀는 유난히 도토리묵을 좋아해 근처의 한 묵밥집에서 하루 한 끼를 해결하는데 어린 소녀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렇게 둘은 친분을 쌓는다. 찾으면 찾을수록 생부는 오리무중이다.

호훈은 외국 근무가 잦은 아버지 때문에 1년 휴학했기에 사실상 19살 성인이다. 자유분방한 성품의 호훈 부모는 토일 부모와 달리 임신과 결혼을 기뻐한다. 다소 나약한 성격의 호훈은 화를 낸 토일 부모가 내내 마음에 걸려 그들에게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겠다는 엉뚱한 발상을 하고 연락이 끊긴다.

토일은 호훈의 부모와 상견례를 하겠다는 엄마의 전화에 친부 찾는 걸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묵밥집에 들른다. 소녀는 어김없이 나타나고 토일은 그녀의 이름을 물은 뒤 경악한다. 상경한 토일은 호훈의 부모도 이틀째 거처를 모른다고 하자 부모와 함께 여기저기 뒤지다 갑자기 친부를 만나는데.

일단 재미있다. 아직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아이들의 불장난’이란 출발이 다소 유치한 과정으로 전개될 법한 불안 요소를 제거한 각본가 겸 연출가 최 감독의 솜씨가 몹시 세련됐다. 토일이 최 씨 선생들을 만나며 아버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부부싸움을 유발하는 식으로 헛다리짚는 게 촌철살인이다.

계부 김 씨가 한문 선생이기에 사자성어로 웃음을 주는 대사도 고급스럽다. 그중 ‘허술한 계책=불가능’을 뜻하는 연목구어가 유독 두드러진다. 이는 젊은 여성인 최 감독의 고뇌가 오롯이 녹아든 시나리오와 맥락을 함께한다. 엄마는 토일의 친부 최 씨의 잘생긴 외모에 반해 임신과 결혼을 서둘렀다.

하지만 최 씨는 가정에 소홀했다. 말이 이혼이지 사실상 최 씨가 떠나갔다. “나라고 망할 줄 알고 결혼했겠니?”라는 하소연이다. 그래서 하나뿐인 딸만큼은 ‘정상적인’ 연애와 결혼을 하길 간절히 바랐건만 자신의 전철을 밟기에 안타깝다. 그건 토일 역시 마찬가지고, 친부를 꼭 만나고 싶은 이유다.

그녀는 “호훈이 왜 좋니”라는 고향 친구 복남의 질문에 일단 잘생겼다고 답한다. 이 시퀀스는 중의적 표현인 듯하다. 한마디로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는. 이는 감독의 어설픈 사랑에 눈이 먼 연애와 결혼으로 실패를 경험하는 적지 않은 여성들에 대한 훈계다. 토일은 제가 누굴 닮았는지 알고 싶다.

그래야 호훈과의 결혼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토록 재미있는 내용이 관념론과 유물론, 경험론과 합리주의의 대립으로 펼쳐지니 의미론까지 풍부하다. 김 씨는 비록 계부지만 토일을 친딸과 다름없이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외려 엄마보다 더 토일을 배려하고, 이해하려 애썼다.

토일이 가출했을 때 그는 자신이 불편해 그랬을까 봐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친부를 찾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엄청나게 서운해한다. 결혼식 때 친부의 손을 잡고 입장하려 그랬다고 오해하는 것. 관념론과 유물론의 갈등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나 법적으로 보나 토일의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최 씨다.

다소 유치할 수도 있는 ‘낳은 정이냐, 키운 정이냐’는 대립항을 감독은 김 씨와 최 씨의 아기자기한 신경전으로 잘 전개하더니 마지막 시퀀스에서 아주 현명하게 매조진다. 토일과 엄마의 갈등은 저 유명한 경험론과 합리론의 양가성이다. 엄마는 합리주의자고, 토일은 경험론자라 대립하는 것이다.

엄마는 “꼭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어야 하겠니? 너 같은 딸 낳을까 봐 안 무섭니?”라며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한다고 꾸짖는다. 하지만 토일은 “그럴 줄 알고 낳는 것”이라고 응수한다. 하지만 결국 토일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호훈에게서 친부를 본 것.

칸트는 니체에게 ‘쾨니히스베르크의 중국인’라고 놀림을 당했지만 경험론과 합리론의 종합을 시도한 것만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그의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다’라는 명제는 그래서 위대하다. 맹목적인 토일과 공허한 울림만 맴도는 엄마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도대체 토일의 친부의 정체는 누구인지, 호훈은 왜 잠적했고, 그동안 뭘 했는지, 토일과 호훈은 어떤 결말을 맞을지, 살짝 미스터리 요소까지 가미된 이 영화의 결말은 상당히 궁금하다. 캐스팅도 절묘하다. ‘기생충’의 장혜진,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강말금, 그리고 남문철의 감초 연기가 돋보인다.

최덕문은 중심을 잡아주고, 이해영은 복병이며, 정수정은 뛰어난 배우다. 그녀가 후반에 제일 길게 입는 티셔츠엔 ‘Fritz’가 씌어있다. ‘고장난’ 엄마나 토일이나 최 씨의 삶일 수도, 자본주의의 계급을 비판한 최초의 SF ‘메트로폴리스’를 연출한 오스트리아의 프리츠 랑 감독일 수도 있다. 1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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