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20. 10. 17.(토) 10:00~13:00
■ 장소 : 조계사 옆 우정총국(체신기념관) 회화나무 앞(종각역2번 출구 도보 8분)
■ 코스 : 조계사(보성사터) - 서울중앙교회(시천교당터) - 서인사주차장(사동궁터) - 3.1독립선언광장(태화관터) - 경인미술관(박영효집터,중성사인쇄) - 천도교중앙대교당. 수운회관 – 이종일집터(민가다헌) - 종로경찰서‧안동의원터 – 감고당인쇄소 – 의암성사(손병희)집터 – 춘암상사(박인호)집터
■ 주관 : 문화지평
■ 후원 : 서울시청(건축기획과)

▲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서울의 종단별 첫 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을 진행한다.

[미디어파인 칼럼=종교‧근대건축물 답사] 2020년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의 ‘종단별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건축물 답사‧아카이빙’ 사업 5회 차 답사가 지난 10월 17일 진행됐다. 이번 답사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비롯해 종로에서 북촌까지 항일과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는 시간이었다. 해설은 김태휘 역사문화해설사가 진행했다.

문화지평 답사팀은 17일 오전 10시 조계사 옆에 위치한 우정총국(체신기념관) 앞에서 만나 일정을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미뤄졌던 답사가 3개월 만에 재개된 순간이었다. 이번 답사는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한 천도교의 중앙대교당을 중심으로 인근에 있는 삼일운동 관련 인물과 유적을 찾는 데 방점을 뒀다.

독립선언서 찍어 낸 보성사 터서 답사 시작

▲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옛 보성사(사진위) 모습과 불타버린 모습. 지금은 조계사가 들어서 있다.

김태휘 해설사는 창덕궁‧의릉 궁궐길라잡이,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있으면서 역사와 조경생태 분야 전문가다. 그래서 역사와 유물, 생태환경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늘 흥미로운 시간여행을 이끄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이날도 건축물은 물론 나무와 풀, 꽃 등에 대한 전문적 설명을 곁들인 다채로운 해설을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다.

답사는 모임 장소인 우정총국(사적제213호)에서부터 시작됐다. 우정총국은 1884년 4월 문을 열었다가 12월 폐지된 최초의 근대식 체신기관이다. 홍영식이 책임자로 임명됐지만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실패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30년 경성중앙편집국장 관사였다가 해방 후 적산으로 분류돼 개인에게 팔렸다. 이후 동대문구, 체신부 우표도안실을 거쳐 체신기념관이 됐다.

눈길을 조계사 경내로 돌리면 대웅전 앞에 오래된 회화나무 한그루가 눈에 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사찰이 들어섰지만 보성학교와 학교소속 인쇄소인 보성사가 있던 자리란 것을 증명하는 나무다. 당시 학교를 찍은 사진에 회화나무가 선명하게 나와 있다. 나무를 기준으로 건물의 대략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귀한 지표다.

보성사는 천도교의 보문관과 보성학원 보성사를 합병한 것이다. 천도교 중앙교당 천도교 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를 찍어내는 창신사가 있었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보성사와 창신사를 한데 묶고 이름을 보성사로 했다. 답사객들은 천도교 이야기를 조계사에서 시작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성사는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의 신문관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 양대산맥 이었다.

보성사의 역사적 의미는 독립선언서 인쇄에 있다. 1919년 2월 최남선이 초안을 잡은 독립선언서를 신문관에서 조판하고 보성사에서 찍어냈다. 인쇄계 양대산맥의 합작품이 셈이다. 찍어낸 분량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김 해설사는 3·1운동 거사 4일 전인 2월25일 2만5000장, 이틀 전인 27일 추가로 1만장을 찍었다고 했다. 일제는 3‧1운동 직후 보성사를 폐쇄하고 6월23일 밤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조계사 경내를 지나 뒤편에 있는 수송공원에 다다랐다. 수송공원 입구에는 보성사 터 표지석이 있다. 이곳에서 김 해설사는 독립선언서를 인쇄 과정에서 발생한 중대 사건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천도교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던 일제 고등계형사 신승희가 인쇄 현장을 목격하는 일촉즉발의 일이 발생했다. 보성사 사장이던 이종일은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5000원을 받아 신승희에게 전달해서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수송공원 한가운데 서 있는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이종일이다.

또 한 번은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손수레에 실어 천도교 본부로 옮기던 중 일경에게 검문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이를 족보라고 속여 넘어간 일화도 회자되고 있다. 두 사건이 유야무야 됐기 때문에 3·1운동이란 거국적 거사가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김 해설사는 답사팀을 시천교당 터로 이끌었다.

천도교란

천도교는 1860년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선포하며 창시한 동학에서 비롯됐다. 1905년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칭됐다. 이후 남녀노소, 빈부귀천 차별이 없는 인간평등주의를 전개하고 안정된 조직과 재정을 갖춘 사회 세력으로 성장했다. 교세가 100만 명 이상 될 정도로 확장했다. 당시 조선의 종교 중 가장 많은 신도 수를 가졌다.

이런 천도교의 문화운동은 학교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줬고 이를 통해 계몽운동과 사회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개벽’, ‘어린이’ 등의 잡지를 발간하고 농민운동 및 노동운동, 어린이운동까지 각 부문별로 주도적인 문화운동을 펼쳤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에 천도교인이 15명이었다. 단일 종교로는 최대 인원이다. 기독교가 16명이었으나 교파가 달랐고 불교는 2명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의 대표가 손병희였다는 사실은 3.1운동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극명하게 입증하는 것이다.

3·1운동 후에도 천도교는 6‧10만세사건, 신간회사건, 오심당운동, 무인독립운동 등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항일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또 상해임시정부의 발족과 운영에도 천도교가 상당 부분 일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천교‧의친왕‧박영효, 그리고 항일과 친일

▲ 천도교에서 분파돼 나간 시천교가 있던 자리. 지금의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서울중앙교회 자리잡고 있다.

시천교는 1906년 이용구가 천도교에서 떨어져 나와 분파한 종교다. 이용구는 손병희와 함께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제자가 돼 교세 확장에 힘을 보탰지만 일진회를 조직해 친일 행보를 걷다가 교단에서 출교를 당한다. 이후 그를 따르면 몇몇 신도들과 더불어 종로구 견지동, 지금의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서울중앙교회 자리에서 시천교를 창교했다.

천도교와 대립각을 세우며 창교한 시천교는 초창기 교세가 빠르게 확대돼 천도교를 능가할 정도였지만 일진회의 해산과 이용구의 죽음으로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반일 사상의 천도교에서 친일 사상의 시천교가 분파됐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시천교터 설명을 듣고 의친왕 이강의 집터에 도착했다. 종로구 관훈동 196번지 일대가 의친왕의 사저인 사동궁이 있던 자리다. 이강은 고종과 귀인 장 씨 사이에서 난 서출 5남으로 왕족 중에서 드물게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애초에 총 7880㎡ 대지위에 양관 1채와 한옥 수십 채로 이뤄진 대저택이었지만 이후 쪼개져서 팔렸다. 2005년 종로구청에서 매입해 공영주차장을 만들었다. 건물 상태가 좋지 않아 모두 헐어내고 그나마 쓸 만했던 한옥 한 채는 보수해서 인사동 관광홍보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강은 미국 유학파로 귀국 후 적십자총재를 지냈다. 항일독립투사들과 접촉을 갖고 상해임시정부로 망명을 계획했지만 만주에서 일경에 발각돼 본국으로 송환됐다. 일본 정부로부터 도일을 권유 받았지만 끝내 거부했다. 일제의 단발령에도 응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영양실조로 죽음을 맞았다는 비운의 왕족이다. 인사동을 가로질러 경인미술관에 이르렀다.

경인미술관은 일제 강점기 내부대신을 지낸 친일파 박영효의 집터다. 홍영식,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인물이다.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해 부마가 됐지만 3개월 만에 사별했다. 금릉위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에 봉해져서 받은 집터가 있던 곳이 바로 경인미술관이다.

박영효의 집은 남산골한옥마을이 조성되면서 이건 됐고 이후 몇 차례 증개축을 통해 1983년 미술관이 들어섰다. 경인은 미술관 설립자 이금홍의 호다. 김 해설사는 이곳을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가는 길에 ‘오아시스’ 같은 곳으로 여겨 들렸다고 설명했다. 답사팀은 잠시 짬을 내 미술관을 둘러보고 단체사진을 찍기도 했다.

항일의 본거지 천도교 중앙대교당

▲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돼 지금도 사용 중인 천도교 중앙대교당. 답사팀이 단체사진을 찍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은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 설계와 중국인 장시영이 시공해 1921년에 건립됐다. 일본인에게 설계를 맡긴 것은 당시 기술 있는 조선인 건축가가 없고 조선총독부 산하의 건축가를 고용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결정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근대성을 실현하는 역량이 미흡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도 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우리나라 천도교의 총본산이다. 건축사적 의미도 크지만 민족사적인 측면에서 의미가 큰 건축물이다. 일제 식민통치권력은 천도교를 우리 민족의 민족종교로 인식했기 때문에 종교가 아닌 ‘유사종교’로 분류해 통제와 규제를 가했다. 그래서 천도교는 식민통치 말기로 갈수록 교세가 쇠퇴하는 비운을 맞았고 천도교 종교건축도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천도교는 교세 확장에 따라 손병희는 종로구 송현동에 있던 천도교 본부를 이전하고 교당을 건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총독부는 천도교의 건축계획을 초기에는 거부했다. 천도교측은 400평 규모의 대교당을 계획하고 1918년 건축 허가를 신청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신축교당이 지나치게 크다’, ‘성금모금을 중지하고 받은 성금은 돌려줘라’,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 등의 이유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절반으로 규모를 축소하여 허가를 받았다. 할 수 없이 절반 규모로 줄여서 허가를 받아 1919년 봄에 착공했지만 3·1운동 여파와 조선총독부의 방해 등 이유로 건립이 늦어져 1921년에야 완공됐다.

기초는 화강석으로 쌓았고 벽체는 붉은 벽돌, 지붕은 철근앵글로 지어 기둥을 쓰지 않아도 되게 했다. 화강석은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채석한 것이다. 총 건평은 927.87m²(280.68평), 4층으로 후면에 강당을 연결한 형태의 건물이다. 약 800명에서 1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다. 3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는 바닥에 앉는 형태였기 때문에 편차가 큰 것으로 해석된다. 1930년대 들어서는 바닥에 일본식 다다미를 시공했고 1940년대에는 나무의자를 설치했다. 지금은 접이식 의자로 이동이 가능하도록 했다.

건축양식은 2층 사무실을 탑 모양의 바로크 풍으로 하는 등 복합적인 아르누보 형식을 띠고 있다. 공사비 30만원은 교인 1호당 10원씩 성금을 모은 것이다. 공사기간 중 시공자인 장시영이 구속되면서 벽돌수급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총 소요된 건축비는 22만원, 사무실까지 합치면 27만 원이다. 나머지는 3·1운동자금으로 사용됐다. 보성사 이종일 사장이 이승훈에게 5000원을 받아 일제 고등계형사 신승희에게 준 자금 출처도 건축비서 남은 금액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당시 명동성당(1898), 조선총독부(1926)와 함께 서울의 3대 건축물로 손꼽혔다. 순수 우리 민족의 성금만으로 지은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

▲ 일제강점기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대교당(①)과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②) 모습. 중앙종리원(③)과 더불어 북촌 천도교 타운을 형성했으나 수운기념관은 1970년대 초 건물 앞 3·1대로가 확장되면서 철거됐다.

현 주차장 부지에는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수운기념관)이 있었다. 대신사는 천도교 모태인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를 뜻한다. 그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1925년 지어진 건축물로 한국 근대건축 선구자로 최근 재조명된 이훈우의 대표작이다. 각종 시국 행사는 물론 다양한 문화, 스포츠 이벤트가 열렸던 공간으로 상당히 큰 건축물이었다.

1970년대 초 건물 앞 삼일로가 삼일대로로 확장되면서 철거됐다. 이 건물은 성신가정여학교(성신여대 전신), 동양공과학원(한양대 전신)의 교사로 사용됐다는 기록도 있다. 중앙대교당과 수운기념관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징발하기도 했다. 중앙대교당은 경기도청에서 징발해 군 피복공장을 하겠다는 김흥배란 자에게 불하해 재봉틀까지 갖다 놨으나 해방을 맞았다. 수운기념관은 1944년 종로구에서 일부를 빌려 호적과 업무를 보기도 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수운기념관에서는 경성의 수많은 문화행사가 열렸다. 천도교 측은 집회, 강연회, 음악회, 무용발표회 등 강당이 필요한 사회활동에 적극 장소를 제공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개최된 음악회를 살펴보면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과 마찬가지로 조선인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전문 음악인의 음악회보다는 발표회 형식의 대중을 위한 오락기능이 주요 목적이었다.

또한 이곳은 노동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와 조선총독부의 집중적 감시를 받던 세력이 주로 이용했다. 당시 천도교는 기독교와 함께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핵심 세력으로,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독립운동 기본계획과 독립선언서의 배포 그리고 해외 독립운동 자금 운영 등의 거점 공간이었다.

3·1운동과 최초의 기자대회인 ‘전조선기자대회’, 김구 선생의 임정 귀국 연설 등 일제 식민 시기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민족운동, 민족종교운동, 문화운동의 산실로 자리했다. 1922년 10월 22일 열린 노동자대회는 몸값 40전과 매달 30전을 경찰에 상납해야 했던 서울시내의 지게꾼들이 운집한 성토대회 장이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개최한 음악회의 많지 않지만 조선인을 하나로 모아 노래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켰고 종교와 관계없이 조선의 모든 세대에 음악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던 공간이다. 아울러 일제 식민지기 억눌리고 빼앗긴 조선인들의 아픔을 대변하고 약자의 입장에서 민중 계몽운동을 펼친 민족 화합의 공간, 민의의 전당이었단 평가다.

어린이 관련 행사나 동요대회 등이 주요 음악행사로 열렸는 데 이는 어린이란 단어를 처음 썼던 소파 방정환의 영향이다. 30대 초반 요절한 방정환은 손병희의 사위였다. 어린이운동 발상지 표석이 천도교 중앙대교당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이유다.

봉황각 근처로 이건된 중앙종리원

▲ 1922년 지은 중앙종리원 건물(중앙총부 본관)은 수운회관이 들어서면서 강북구에 있는 봉황각 근처로 옮겨 세웠다.

중앙대교당 옆에는 수운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1922년 지은 중앙종리원 건물(중앙총부 본관)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중앙대교당, 대신사백년기념관(수운기념관)’과 더불어 천도교 단지를 이뤘다. 중앙종리원은 강북구 삼양로에 있는 천도교의 대표적인 항일운동 본거지 봉황각 근처로 이건됐다.

수운회관은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 때인 1971년에 지어졌다. 청와대 근처에 16층이나 되는 고층건물이 허가가 쉽게 날 리 없던 시절이라 의아했지만 천도교 교령이었던 최덕신 때문이란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서 이해가 됐다.

최덕신은 육사교장으로 있으면서 박정희와는 사제지간으로 맺어진 관계다. ‘수운회관’이란 판석의 각자 글씨가 박정희 것이란 소리도 있다. 이 때문에 고층건물이 들어섰고 지금은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을 대신해 천도교의 자산으로 활용되고 있다. 보성사 이종일 사장의 집도 이 근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는 또 한번 아이러니하게 흘러갔다. 박정희 정권에서 외무장관까지 지낸 최덕신은 1977년 도미한 후 박정희를 파쇼정권이라고 비난했다. 이후 1986년 부인과 함께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의 아버지 최동오는 화성의숙 시절 김일성의 스승이었다. 남북의 최고 권력자이자 독재자를 제자로 둔 최 씨 부자의 삶이 파란만장하단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부자는 나란히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최제우 단골 안동의원과 손병희‧박인호 집터

▲ 동학 초대 교주 최제우가 단골로 다녔던 안동의원 자리에는 지금은 걸스카우트 빌딩이 들어서 있고 천도교 3대 교주 의암성사 손병희 집터는 북촌박물관, 4대 대도주 춘암상사 박인호의 집터는 천주교 시설이 들어서 있다.

율곡로 53에 있는 걸스카우트 건물은 안동의원이 있던 곳이다. 안동의원은 동학 교주 최제우가 주로 다니던 병원이다. 안동은 안동별궁이 근처에 있어서 인근 지역에 보편적으로 쓰였다. 윤보선가 앞에 있는 안동교회도 같은 맥락이다.

안동별궁은 구 풍문여고, 지금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서울공예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고종황제는 황태자 순종의 혼례를 위한 별궁을 세웠고 이를 안국동별궁 또는 안동별궁이라고 했다. 이 땅은 세종이 민가를 구입해 아들 영응대군의 집을 지으면서 이 씨 왕가의 땅으로 내려오다가 1930년 대 민간에게 팔렸다.

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김 해설사는 답사팀을 의암성사 손병희의 집터로 안내했다. 현재는 북촌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손병희의 집에서는 3‧1운동 전날인 2월28일 민족대표들이 모여 얼굴을 익혔다. 손병희 집터서 길을 건너 북악 쪽으로 조금 오르면 제4대 대도주를 지낸 춘암상사 박인호의 집터가 있다. 지금은 천주교 노틀담서울교육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 답사는 이곳에서 종료했다.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지자체‧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강연 진행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보성사(普成社)
-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 천도교중앙대교당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경성 문화시설의 입지적 특성과 사회적 기능에 관한 연구 : 서울대학교 대학원, 2020, 김성태
- 천도교중앙대교당 50년 이야기 : 모시는사람들, 2008, 이동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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