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 ‘월-E’(앤드류 스탠튼 감독, 2008)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E.T.’, ‘A.I.’ 등이 던진 메시지가 노골적인 썩 강력한 환경보호 캠페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는 BnL이라는 대기업이 장악했다. 비엔엘은 날로 황폐해지는 지구 청소 계획이 실패하자 우주 이주 계획을 실행한다.

엄청나게 큰 전자동 시스템의 우주선 액시엄에 전 지구인을 태워 우주 공간에서 지내게 만든 지 700년. 사람들은 지구를 떠날 때 모든 기계의 전원을 껐지만 실수로 폐기물 처리 로봇 월-E 중 하나만큼은 무심코 지나쳤다. 월이는 유일한 생명체인 바퀴벌레를 친구 삼아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어느 날 평상시처럼 고철을 압축해 건물처럼 쌓아올리던 월이는 새싹 하나를 발견하고 거처에 소중하게 보관한다. 그리고 곧 액시엄이 보낸 매력적인 탐사 로봇 이브가 월이와 마주친다. 이브는 지구에 인류가 귀환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게 임무. 월이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새싹을 선물한다.

새싹을 보자 깜짝 놀란 이브의 자동 시스템이 곧바로 작동돼 새싹을 몸체 안에 보관한 뒤 이브는 마치 동면 상태처럼 기능이 정지한다. 곧 우주선이 날아와 이브를 회수하자 놀란 월이는 그 우주선에 매달린다. 얼마 후 우주선은 모함인 액시엄으로 귀환하고 월이는 외계 오염 물질로 취급되는데.

스탠튼은 ‘니모를 찾아서’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애니메이션 전문 작가 겸 감독이다. 이 작품이 ‘고작’ 132만여 명의 관객밖에 동원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 대사가 거의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선장 등 일부 사람들의 대사가 고작이지만 주연 로봇 둘의 호칭만으로도 감정은 충분히 전달된다.

700년을 액시엄 안에서 우주 공간을 떠다닌 인류는 인공수정으로 종족을 보존해왔다. 전자동 호버체어에 앉아 생활하기에 운동 부족으로 극도로 비만해졌고, 체력은 크게 저하됐다. 어른마저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다. 또한 월이에게서 떨어져 나온 흙을 외계 오염 물질로 판단할 만큼 자연에 무지하다.

액시엄 안에서 인간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다. 커피 잔을 집으려 손을 뻗는 것조차 못 할 만큼 호버체어와 로봇 등이 모든 걸 해결해 주도록 컴퓨터 시스템이 구축돼있다. 첨단의 디지털 기계화가 당장에는 편리할 줄 몰라도 인류의 행복에 반드시 부합되는 것은 아니라는 노골적인 메시지.

그건 곧 비엔엘이라는 대기업이 지구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실질적인 집권자가 된 자본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경고와 연계된다. 비엔엘은 대형 마트부터 지역 주유소까지 모든 상권과 교육 등에서 주체이기 때문에 지구인을 장악할 수 있었다. 대신 그들이 제공한 건 편의다.

700년 전 비엔엘의 CEO는 액시엄을 띄울 때 조종간 컴퓨터 오토에게 지구 귀환 금지 명령을 프로그래밍했다. 액시엄에서 태어나 선조가 만든 영상과 컴퓨터의 교육으로 성장한 선장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Axiom(공리)과 경험론의 충돌이다.

비엔엘이 인류를 낳고 기르는 액시엄이라는 공간은 대기업이 정한 공리라는 규칙에 의해 지배된다. 여기서 인간미라든가 탄력성은 무시될 뿐 오로지 기계적인 원칙만이 규정된다. 그 공리는 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해 인식하고 설명하는 사변적 법칙으로 인류의 오랜 경험을 무시한다.

경험에 앞서 인식의 주관적 형식이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존재한다는 용어가 선험적이다. 그런데 선험적은 경험론의 반대가 아니라 연결과 가깝다. ‘통섭’을 쓴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이 유전에 의해 미리 형성하는 선험적 주관을 ‘후성규칙’이라고 했다. 결국 선대의 경험이 DNA를 통해 대물림되는 것.

이토록 비뚤어진 도그마에의 준행이 약속된 액시엄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일종의 왜곡된 스탈린식 공산주의였다. 인공수정으로 탄생한 사람은 부모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 채 플라톤(탄생한 아이는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게 단체 생활을 시키자고 주장)식 유토피아에서 살고 있었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주연의 뮤지컬 영화 ‘헬로 돌리’(1969)가 삽입됐고, 루이 암스트롱의 ‘장밋빛 인생’이 흘러나온다. 낡은 큐브와 VCR, 그리고 도스 게임 퐁까지 모두 아날로그 정서와 문화를 찬양하는 코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같은 기계의 반란이다.

초반에 비춘 한 별에서 지구인의 개척 흔적이 보인다. 인류가 지구를 떠난 지 700년이 지나자 드디어 지구의 환경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인류는 환경파괴의 주범이고, 인류가 사라져야 자연이 건강해진다는 이 전율할 메시지! 이 영화는 ‘사람답게 사는 것’과 ‘그냥 생존하는 것’의 차이에 집중한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로 유명하다. 이원론적으로는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은 다른 듯하면서도 유사하지만 일원론적으로는 관념론과 유물론처럼 구별과 선택이 필요하다. 관념론자라면 당연히 존재양식에서 무류성을 찾을 것이다. 액시엄은 인류에게 액시엄을 지키면 생존할 수 있다고 알린다.

하지만 선장은 “난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친다. 최첨단의 이브는 월이만큼 낡은 그의 지포를 신기해한다. 과학의 발달은 결코 인간의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로부터 불을 받은 원시 인류가 행복하다는 이브의 표정. 그냥 사는 생존이냐, 사람답게 사는 인생이냐의 실존주의적 존재론.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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