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20. 10. 31(토) 10:00~13:00
■ 장소 : 성균관대 정문
■ 코스 : 성균관 내부 - 양현고
■ 주관 : 문화지평
■ 후원 : 서울시청(건축기획과)
■ 해설 : 김태휘 해설사

▲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서울의 종단별 첫 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을 진행한다.

[미디어파인 칼럼=종교‧근대건축물 답사] 사실 이번 답사를 기획하면서 고민에 빠졌던 부분이 바로 유교다. 유교를 종교로 보는 것이 합당한 것이냐가 고민의 핵심이었다. 유교는 조선왕조 500년과 이후 근현대 우리 일상을 지배한 시대정신이란 점에서 종교적 관점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 찾을 수 있는 예배와 교리 공부가 제례와 강학이란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 최종적으로 유교를 종교의 범주에 넣었다.

2020년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의 ‘종단별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건축물 답사‧아카이빙’ 사업이 드디어 7회차 마지막 답사를 마쳤다. 답사는 지난 10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 성균관대학교 정문에서 시작됐다. 이날 해설은 김태휘 해설사의 해설로 진행됐다.

유교란?

▲ 성균관대 정문 앞에서 시작된 ‘2020년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사업’ 일환 ‘종단별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건축물 답사‧아카이빙’ 마지막 7회 차 모습. 김태휘 해설가가 유교에 대한 사전 지식을 나누고 있다.

유교를 한 줄로 정의하면 ‘인(仁)이라는 덕목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확장해 나아가는 것을 인간의 도덕규범으로 가르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유교 종교성의 핵심은 성인지도(聖人之道)다.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초월적 뿌리를 담지한 자로서 그것의 신장과 계발을 통해서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유교의 종교성이 출발한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던 한반도는 중국 진, 한 시대 때부터 공자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중국의 제도를 본 따서 만든 국립대학 태학에서 지배계급의 자제를 교육시켰다.

이는 이미 한자가 전래됨과 동시에 한자 속에 내포된 유교사상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를 보는 중국의 시각이 고대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는 기록이 많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조선전(朝鮮傳)이나 한서의 지리지(地理志)는 고대 한민족에 대해서 ‘도적이 없고, 부인들이 정신(貞信)하고, 그 성품이 인자하고 유순하여 가장 인도적이었다’고 적고 있다.

예로부터 어진 사람들이 산다는 우리나라에 공맹의 사상이 전해져서 통치원리로 응용됐을 뿐 아니라 사회규범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교육제도를 정비하고 풍속을 순화시키는데 유교사상이 큰 역할을 했다.

혼인습속에서 매매혼이 사라지고 부모와 남편 상례에 있어서 3년 복이 권장된 점, 순장제도를 금지시킨 것들이 있다. 유교사상은 특히 충효 사상을 고취시켰는데, 고구려의 태학이나 통일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에서는 논어와 효경이 필수과목이었다. 인과 효 사상이 정치와 교육의 근본이 되도록 했고 조상숭배를 중요시했다.

유교의 종교적 측면은 경천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유교에서는 제사를 중요시하는 것도 경천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행하는 제의는 기복행사지만 유교에서는는 윤리성과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공자는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도(道)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할 정도로 도와의 일치를 추구했다. 인간의 도리를 의미하는 인은 자식을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은 부모가 죽어서도 제사의 형태로 유지됨으로써 사회의 정신적 방향이 정립된다. 효는 존경의 마음이 조상뿐만 아니라 경천에 이르는 유교의 중요한 종교적 덕목이다.

김 해설사는 “조선시대가 시작되면서 유교적 지식인이 주축이 된 새로운 지배계층은 유교를 국가의 유일한 통치 이념으로 천명하고 지배계급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생활양식까지도 유교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다”며 “그들은 수도에 ‘성균관(成均館)’이라는 최고 교육기관을 두고, 모든 고을에 ‘항교’라는 지역 학교를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모든 학교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졌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성현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키웠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각 지역 유교 지식인들이 사립학교 성격의 ‘서원’을 세웠다. 이런 시스템 위에서 조선은 유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르는 예법과 풍속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시책을 펼치면서 궁극적으로는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현대 사회에 접어들어 유교가 쇠퇴한 이유는 바로 사회 통치제제의 약화다. 신분 제도가 사라지고 사회적 성취의 기준이 달라진 상황에서 유교는 ‘최고의 가르침’으로서의 지위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외형적으로 유교를 신앙하는 모습은 더 이상 한국 사회에 남지 않게 되면서 종교적인 가치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조선 최고 교육기관이자 유교 전당 ‘성균관’

▲ 문묘와 성균관 배치도.

성균관대 정문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것이 탕평비각과 하마비다. 당쟁의 폐단을 막기 위해 영조 18년(1742)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린 글을 비로 만들어 1칸 규모의 비각 안에 두었다. 일명 어서비각(御書碑閣)이라고도 한다.

비각 옆의 하마비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란 글이 각자돼 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려라’란 뜻이다. 문묘 정문인 신삼문은 늘 굳게 닫혀 있었지만 이날 제례가 있느 날이라 운 좋게도 열린 모습을 봤다. 신삼문은 성현들의 넋이 출입하는 세 개의 문이다. 답사팀은 신삼문 우측편으로 걸어갔다.

건물 우측에는 임금이 성균관을 방문할 때 타고 온 가마를 내려놓던 하연대가 있다. 하연대 옆으로는 동삼문이 있는데 이 문은 임금만 드나들 수 있다. 요즘도 평상시에는 닫혀 있다. 일반 관람객은 동삼문 위쪽에 대문으로 입장이 가능하다.

유교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중심이념이 되면서 이를 위한 유교건축이 발달했다. 크게 나누어 제사를 지내기 위한 '예제건축'과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학건축'이 있다. 사직단과 종묘, 성균관, 향교, 서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도 향교와 서원은 공부하는 곳과 제사를 지내는 곳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또 전국적으로 분포하기 때문에 한옥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유교건축은 성리학의 미학 즉 절제와 명분에 따라 축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장식을 줄여 검소하고 소박하게 지어졌다.

망 분향일 겹쳐 운 좋게 대성전 내부 관람

▲ 성균관의 망(望) 분향일에 답사를 해서 의관을 정제한 유림들이 대성전 앞에서 치른 분향례와 대성전 내부에 봉안된 성리학의 선성선현(先聖先賢) 위패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대성전을 만났다. 대성전 현판은 조선 명필 한석봉의 글씨다. 이날은 마침 성균관의 망(望) 분향일이라서 의관을 정제한 유림들이 대성전 앞에서 치른 분향례를 볼 수 있었다. 또 운 좋게 대성전 내부에 봉안된 성리학의 선성선현(先聖先賢) 위패를 직접 보기도 했다. 분향례를 준비 중이던 박광영 의례부장이 친절하게 설명까지 곁들여 이해를 도왔다. 대성전에는 오성, 공문 10철, 송조 6현, 해동(우리나라) 18현 등 모두 39분의 위패가 있다.

문선왕(공자의 존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증자, 맹자, 안자, 자사 등을 오성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최치원, 정몽주, 송시열, 설총, 안유(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등 내로라하는 거물급 학자들이 봉안돼 있다. 한 달에 두 번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봄, 가을에 한 번씩 석채례(釋菜禮)를 지낸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를 통틀어 문묘라고 하는 데, 이는 제례 공간이다.

문묘와 짝을 이룬 공간이 명륜당이다. 이와 함께 유생들이 기숙하던 동재, 서재 등 해설을 들으며 성균관 내부를 돌아보는 데만 3시간이 걸렸다. 김 해설사가 아주 촘촘하게 성균관의 역사와 건물, 건축에 대해 설명한 자리였다.

설명은 성균관 유생에게 주는 식량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양현고(養賢庫)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표석 앞에서 끝났다. 조선시대에는 양현고 앞에 반수(泮水)라는 인공하천이 흘렀다. 지금은 복개돼 성균관대 정문을 지나는 도로가 됐지만 이 하천을 기준으로 성균관과 반촌으로 공간이 나뉜다.

성균관 유생 뒷바라지 노비들의 집단거주지 반촌

▲ 혜화역 4번 출구부터 성균관대 정문 까지를 과거에는 대명거리라고 불렀는데, 지금과 마찬가지로 상가가 발달돼 있었다. 사진은 대명거리 표지석.

반촌은 지금의 명륜동2‧3가, 그리고 4가 일부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한성 동북부지역은 민가가 거의 없었는데 유독 성균관 주변 반촌은 북적였다고 한다. 반촌에 사는 사람들은 반인(泮人)이라고 하는 데 원래 개성 사람들이다.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고려 학자 안향이 국학을 세우면서 노비 100명을 헌납했는데 이들이 성균관 공노비로 이어진 것이다. 반인과 반촌은 성균관의 별칭인 반궁(泮宮)에서 분화된 이름이다. 반인들의 임무는 문묘 수호와 유생 공궤다. 성균관의 제례를 지원하고 유생들 뒷바라지가 주요 사역이다.

성균관은 고려시대 개경에 있다가 조선 건국 이후 1397년 한양 숭교방 지역으로 옮겨왔다. 그때 노비들도 따라 내려와 반촌을 이룬 것이다. 반촌은 반인들이 거주 공간이자 성균관 유생들이 밖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대명거리는 지금의 혜화역 4번 출구에서부터 성균관대 정문에 이르는 길은 그때도 잘 발달된 상가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반촌에서는 유생들이 바둑과 같은 여가생활을 즐겼고 지방에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상경한 이들의 임시 거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반인은 노비 신분이었지만 성균관이란 특수공간의 노비라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았다. 조선시대는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는 우금(牛禁) 정책이 있었다. 성균관에서 올리는 제사와 유생들 식사를 위해 소고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성균관 내에 도사(屠肆)를 설치해 반인이 그 일을 담당하게 했다.

반인들은 당시 성균관 노역에 집중해야 했기에 농업, 수공업 등과 같은 생계유지형 일을 별도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정은 그들에게 남은 소고기와 부산물을 내다 팔아 이윤을 취할 수 있게 했다. 이는 다른 노비들과 마찬가지로 신공(身貢)을 바치는 역을 수행하는 노비지만 반인들에게만 주어진 경제적 특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성균관과의 ‘경제공동체’ 개념 때문이다.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7세기 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성균관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땅인 학전(學田)의 상당 부분을 다른 권력기관에 빼앗기게 된다. 주요 재원이던 학전 수입이 줄어들게 되면서 성균관은 이를 반인들로부터 충당하게 된다.

18세가 도사가 현방(懸房‧다림방‧지금의 정육점)으로 변하면서 반인들은 한양 내 소고기 판매 독점권을 가진다. 이는 노비들 생계유지와 성균관 공역을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최대 23개까지 운영됐던 현방은 공물을 쌀로 통일시킨 대동법이 가져온 교환경제체제와 맞물려 호황을 누리게 된다. 교환경제는 시장을 만들었고 양반이 아닌 계층에서도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됐다. 이때 부자가 된 중인층이 양반 문화를 흉내 내며 소고기 수요를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조정은 소고기 판매 독점권을 주되 수익 일부를 성균관 재원으로 활용하게 했다. 명분은 우금정책 위반이다. 소 도살은 위법이기 때문에 사헌부·형조·한성부 등 세 사법기관에 벌금인 속전(贖錢)을 내게 했다. 속전은 성균관 운영 이외도 사법기관 소속 하위 공무원 월급과 경상 잡비로 쓰였다.

하루에 도살할 수 있는 소는 한 마리였다. 그러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인계층이 늘면서 소고기 수요가 꾸준히 늘었다.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게 되자 소고기 값은 뛰었을 것이고 지방과 소가죽 등 부산물은 우방전(牛肪廛)과 창전(昌廛)에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인들의 금고도 채워져 갔다.

반인과 성균관의 상호보완관계는 현방 운영을 통한 경제공동체 운명이었기 때문에 안전한 권력 울타리 안에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성균관이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던 것은 유생들 학비와 기숙사비, 식비, 지필묵 등이 모두 무료였기 때문이다.

현방 운영 수입 중 성균관 재정으로 충당되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반인 몫이 됐다. 반인들이 현방마다 4명씩 전문 도살업자인 거모장(去毛匠)을 고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거모장은 ‘반인의 노예’라고 불릴 정도로 반인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이들이다. 이는 노비인 반인들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는 반증이다.

1894년 개화파에 의한 갑오개혁은 이들 반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해 7월부터 12월까지 약 210건의 개혁안이 만들어졌고 공사노비(公私奴婢) 폐지도 그중 하나다. 돈은 있었지만 신분 한계 때문에 사회적으로 움츠려 있었던 이들은 국립 최고 교육기관에서 사역했던 관계로 후대 교육에 눈을 떴다.

반인들 교육열로 세운 숭정의숙(혜화초교)

▲ 국립 최고 교육기관에서 사역했던 반인들은 갑오개혁 후 후대 교육에 눈을 떠 지금의 혜화초등학교(사진) 모태인 숭정의숙을 만들었다.

이들이 돈을 모아 세운 학교가 숭정의숙이다. 소고기 판매상들이 모인 조합에서 1909년 설립 준비를 시작해 지금의 명륜동2가, 당시 사현동에 건물을 빌려 학교를 세우고 이듬해 개교했다. 도살하는 소 한 마리 당 10전 씩, 설렁탕 집에서 매일 5전 씩 기부해 재원을 만들었다. 여러 차례 개명을 한 끝에 지금의 혜화초등학교로 자리 잡았다. 못 배워서 멸시받고 천대받았던 노비 출신 부모 세대의 열정과 염원의 결과다.

한편 소를 자유롭게 도살할 수 있었던 반인들이 모여 산 반촌에는 소고기는 물론 소 부산물이 풍부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소뼈인 사골일 테고 이를 이용한 음식점이 주변에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숭정의숙을 지으면서 설렁탕집에서 매일 5전씩 기부를 받은 것을 보면 이들 반인들이 현방 이외에 소 부산물을 이용해 식당을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당시 성균관 유생 상당수가 경상북도 안동지역을 정점으로 하는 권문세도가 자제였던 탓에 그들이 먹고 자랐던 안동국시에 대한 ‘니즈’가 결합해 사골육수를 베이스로 한 국수집들이 꽤나 생겨나지 않았을까 추론된다.

답사팀은 3시간 가까이 문묘와 성균관 내를 꼼꼼하게 살피다가 밖으로 나와 조선시대에 성균관 유생에게 식량 등의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양현고 터를 찾아갔다. 유림회관에서 송시열 집터 방향으로 200여 미터 오르면 표석이 나온다.

양현고는 성균관 옆에 있었고 돈과 곡식을 출납하는 곳이어서 호조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임금이 내린 성균관 학전 1000결과 소유 토지의 수입, 노비 400명의 신공, 그 외 어세 등이 수입원이었다. 현방을 하는 반인들의 벌금도 수입원이었다. 그 수입으로 성균관 유생들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식량·물품을 공급했다.

원 계획은 송시열 집터까지 갈 예정이었으나 시간이 많이 지체된 관계로 양현고 앞에서 답사를 마쳤다. 4월부터 7개월간 7회에 걸친 각 종단별 종교 건축물 답사는 서울이 품고 있는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별다른 사고 없이 답사를 마칠 수 있어서 주최측의로서는 큰 다행이라 여긴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일정이 뒤로 밀리고 인원을 축소해야 하는 점은 안타까웠다. 모두 수고하셨다.

▲ 명륜당 앞에서 단체사진.

<참고문헌>
-국가한옥센터 홈페이지
-朝鮮後期 女性 性理學者의 생애와 학문에 나타난 儒敎 宗敎性 探究, 성균관대학교, 2007, 이은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유교)
-100가지 이야기로 배우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유교 웹페이지
-프란치스코의 세상 이야기, 서울도보관광-20코스-성균관문묘-코스에서-유생들의-삶을-보다
-위키실록사전, 양현고

[문화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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