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넷' 현장 스틸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마블과 DC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라이벌이다. 일부 작품을 제외하곤 DC가 마블에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예외는 있다. 바로 ‘매트릭스’와 크리스토퍼 놀란(50) 감독의 작품이다.

따라서 DC의 배급사인 워너브러더스와 놀란 감독은 유난히 끈끈한 사이다. 그런데 놀란 감독이 최근 워너브러더스를 공개적으로 저격하고 나섰다.

그 배경은 워너브러더스가 내년 개봉 예정인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시퀄, ‘고질라 vs 콩’, ‘듄’, ‘매트릭스 4’ 등의 블록버스터를 포함한 17편의 영화를 극장과 동시에 HBO Max를 통해 공개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놀란 감독은 7일(현지 시각) 미국 매체 할리우드 리포터에 보낸 서한에서 “현재 영화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감독 및 배우들이 전날까지만 해도 최고의 영화 스튜디오와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잠들었다가 다음날 일어나 보니 자신들이 최악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위해 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영화감독들의 작품을 극장이나 집안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워너브러더스는 그러나 말 그대로 그것을 해체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의 결정은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라고 개봉 시스템의 변화에 강력한 불만을 나타냈다.

또 “훌륭한 배우들과 감독들이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온 정성을 다해 노력한 영화들을 아무와도 논의하지 않고 이제 갓 출범한 스트리밍 서비스의 미끼상품 역할로 전락시켜 버렸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얼마 전 워너브러더스의 모기업인 워너 미디어의 CEO 제이슨 킬라르는 미국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른 산업들과 마찬가지로 극장들도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팬데믹의 한가운데 있으며 이를 뚫고 나갈 방법을 모색 중이고, 그중 하나가 대규모 제작비를 들인 웰메이드 영화를 계속해 제공하는 것”이라며 극장과 스트리밍 서비스 동시 공개가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한 불가피한 결정임을 해명한 바 있다.

놀란 감독은 실질적인 데뷔작 ‘메멘토’부터 최근작 ‘테넷’까지 영화 관계자들은 물론 관객들까지 소름 끼치도록 경악하게 만든 천재 작가로 손꼽힌다. 그는 항상 모든 이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이디어를 기초로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고, 상당히 심오한 철학과 과학을 도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그토록 학구적이면서도 재미를 동시에 잡는다. 인간적 고뇌를 심고, 끈끈한 가족애를 앞세우며, 대척점에 선 사이끼리의 애증까지 담는다. 팬이라면 한 영화를 수차례 감상하는 걸 당연시할 만큼 깊이와 재미를 담보하는 감독이다.

이번의 워너브러더스에 대한 비난에 과연 그의 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지는 배경이다. 하지만 곰곰이 곱씹어 봐도 아무래도 그도 이제 나이가 좀 된 듯하다.

먼저 단순 논리로 영화인으로서의 그의 비판은 당연하게 보인다. 영화와 드라마가 뭐 그리 다르고, 영화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박을 받을 여지가 없지 않지만 뤼미에르 이래 100년이 넘도록 영화인들은 자부심으로 자신의 일에 매진해온 것도 사실이다.

요즘 미국이나 대한민국이나 드라마의 수준은 매우 높아졌다. 제작 시스템도 영화와 별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시간 안팎의 러닝타임을 지닌 영화 한 편이 크랭크인부터 극장에 내걸리기까지 최소한 반년 이상 걸리는 것과 달리 드라마는 제작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다. 사전 제작 드라마일지라도 분량 대비 영화에 비해 짧은 건 마찬가지.

그건 수고나 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제작 시스템과 방송(개봉)의 차이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는 본방송을 지키는 한 따로 돈을 지불한다거나 수고스럽게 이동한다는 경제적, 육체적 대가 없이 편하게 안방에서 즐길 수 있다는 편의성 측면에서 영화와 가장 다르다.

관객은 영화를 선택하고, 이동하며, 1만 원이 넘는 돈을 들여 관람한다. 관람 전 기다리는 시간까지 투자한다. 요즘은 혼자 감상하는 이들도 꽤 되지만 아직까진 가족, 친구, 연인 등 동반자가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극장이라는 공간 역시 뭔가 문화적인 뉘앙스를 풍기기까지 한다.

이런 변별성이 영화인의 자존심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했다. 아무래도 코로나19가 그 변화를 가속화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건 TV 수상기가 대중화되기 전에 ‘극장 구경’ 하는 게 엄청난 문화적 혜택을 누린다는 자부심을 줬던 시절과 같은 맥락이다. 시대적 인식론은 변하기 마련이다.

이제 극장에 가는 건 그다지 자존심과 연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집에 홈시어터 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즐긴다면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스스로 만족도도 높다. 더구나 요즘 같은 스마트폰 시청 시대에 대형 스크린은 일부 작품이나 일부 계층을 제외하곤 그다지 의미가 크지 않다.

놀란 감독의 영화인으로서의 자긍심, 그리고 작품의 완성도와 흥행 파워를 동시에 지닌 몇 안 되는 작가로서의 자부심은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시대착오적인 아집이 살짝 엿보이는 지적에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결과론적 선택권은 관객에게 있지 배급사나 감독에게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워너브러더스가 스트리밍 서비스의 원 웨이를 선언했다면 놀란의 비판은 100번, 1000번 지지를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동시 공개다.

놀란 감독의 ‘테넷’은 국내에서 지난 8월 개봉돼 199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인터스텔라’처럼 어려운 작품이 1031만여 명의 관객을 끌어모은 것에 비교하면 아쉬운 성적이지만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극장가가 초토화된 것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이름값은 톡톡히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듯 극장에 갈 사람은 간다. 아니, 극장에서 감상해야 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영화라면 관객은 돈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라나 워쇼스키 감독의 ‘매트릭스 4’나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 같은 경우 마니아라면 절대 스트리밍 서비스로 만나지 않을 것이다. 지적인 허영심에 근거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흥행에서 별다른 폭발력을 보이지 못했고, 평단에선 혹평을 받은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시퀄이라면 고민이 좀 될 듯하다. 그런 관객에게 스트리밍 서비스는 외려 반가운 게 아닐까? 먼저 스트리밍 서비스로 쉽고 싸게 접한 뒤 예상대로 그저 그랬다면 그대로 지나치면 되고, 의외로 빛나는 작품이라면 극장에 가서 제대로 감상한다면 더 값진 경험이 아닐까?

게다가 워너브러더스는 영화감독협회나 시나리오작가협회가 아니라 대기업이다.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메이저 스튜디오다. 그들의 계산법이 옳았는지, 글렀는지는 내년에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때 놀란의 비난이 옳았는지, 시대착오였는지 역시 명석판명될 것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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