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노아’(2014)는 ‘블랙 스완’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구약성서의 노아의 방주에 상상력을 더해 완성했다. 그런데 창조주가 타락한 인간을 벌한다는 기본 뼈대는 어쩐지 지금의 코로나19 팬데믹을 연상케 만든다.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을 창조주의 신하인 감시자들이 도와준다.

그 벌로 빛이었던 감시자들은 돌덩이 거인으로 변하고 아담의 유배지에 고립돼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 카인을 도와준다. 카인의 후예들은 감시자들로부터 모든 지식을 전수받자 강하고 똑똑해져 역으로 감시자들을 사냥한다. 므두셀라는 오히려 감시자들을 돕는다.

어릴 때 카인의 도시인들에게 아버지를 잃은 뒤 500살이 된 노아는 ‘그분’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다. 곧 대홍수가 있을 터이니 방주를 만들어 모든 생명체를 한 쌍씩 모아 가족과 함께 타라는 목소리였다. 그는 아내 나메, 어린 아들 셈, 함, 야벳과 이동하던 중 중상을 입은 소녀 일라를 구하게 된다.

노아는 산에 올라 869살 된 할아버지 므두셀라를 만나 씨앗을 받는다. 가족은 이동 중 격앙된 도시인 무리를 만나 도망치다 돌 거인의 영역에 들어가 억류된다. 그런데 그중 샘야자가 노아에게서 아담의 모습이 보인다며 구해준다. 노아는 씨앗을 심는다. 감시자들은 배신자라며 샘야자를 폭행한다.

그러나 땅에서 물이 샘솟고 사방에 나무가 자라 숲이 우거지는 기적을 보고 노아를 믿는다. 그렇게 그들은 힘을 합쳐 방주 제작에 힘쓴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셈과 일라는 연인이 되지만 예전의 부상으로 불임인 일라는 노아에게 함과 야벳의 신부를 구할 때 셈의 신부도 함께 구해달라고 한다.

소문을 듣고 카인의 후손인 두발가인과 그의 도시인들이 노아의 작업장에 들이닥친다. 하지만 감시자들의 위세에 꺾여 후퇴한 뒤 군인을 모집하고, 무기를 만들며 반격을 준비한다. 함은 신부를 구하러 도시로 가서 나벨을 만나 함께 방주로 가다가 폭주하는 도시인들 사이에서 나벨을 잃고 마는데.

일단 노아의 방주는 기독교만의 신화가 아니다. 기원전 3000년께 기록된 수메르 홍수 신화에 따르면 인간을 창조한 신들의 왕 엔릴은 인간들의 불평으로 소음이 심해지자 대홍수를 일으켜 그들을 없애기로 하고 선량한 통치자 지우수드라에게 방주를 만들라 명하는데 그 이후는 성서랑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고대 중남미의 신화에도 대홍수와 대화재로 신들이 오만한 인간들을 벌하는 인종 청소를 몇 번 단행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따라서 이 영화를 종교적이라고 편견을 갖는 건 금물이다.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에겐 ‘그분’이란 존재가 불편할 수도 있지만 메시지만큼은 썩 교훈적이다.

창조주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하느님이 아닌 우주의 질서(자연법)를 대입하면 쉽다. 작금의 인류는 얼마나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타락했는가! 인류는 자기들의 생존과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라며 자연을 파괴하고 수많은 종을 멸종시켰다. 지금도 환경 파괴는 계속돼 인류 멸망이 거론될 정도.

노아는 자식들에게 육식을 금할 것을 가르친다. 도시인들은 강해진다는 명목으로 육식을 즐긴다. 심지어 고기와 맞바꾸기 위해 소녀를 납치한다. 노아의 눈에 비친 카인의 도시는 지옥도. 그곳에서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한 그는 나메에게 “저들만 사악한 게 아니라 우리도 그렇다”고 자아성찰을 한다.

또 자식에겐 “오직 창조주만을 통해 강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말고 화합할 때 비로소 세상만사가 순조롭게 흐른다는 의미. 더우면 에어컨을 가동하지만 그로 인해 빙하가 녹고 온도가 올라감으로써 지구 생명이 단축된다. 자연에 순응해야지 역행은 해롭다는 진리.

장 자크 루소와 ‘육식의 종말’의 제러미 리프킨이 노아의 제자이든가, 아로노프스키가 루소와 리프킨을 좋아하든가. 노아는 함이 꽃을 꺾자 모든 생명체가 존재하는 이유와 어떤 공간을 차지하는 이유에는 목적이 있다고 설교한다. 그 꽃이 씨를 뿌려 개체를 번식하는 건 창조주의 뜻을 따른다는 것.

감시자들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시킨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았듯 감시자들은 유배됐다. 감독이 창조한 그 캐릭터와 노아의 액션에 의해 기존에 종교적으로만 그려졌던 얘기에 SF와 액션이 가미돼 재미가 쏠쏠해졌다.

성서에 충실한 면도 많다. ‘대장장이 카인’이란 뜻의 두발가인이 철을 다루는 시퀀스, 함이 노아를 배신한 뒤 아라랏산에 정착한 가족을 떠나는 시퀀스다.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고생한 건 그들이 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라는 전승. 노아가 가족과 안 살고 동굴에서 포도주에 절어 벌거벗는 것까지도.

두발가인은 “죽고 사는 건 인간이 결정한다. 인간은 위대하니까. 동물은 우리에게 봉사해야 해”라고 프로타고라스의 인본주의를 외친다. 또 “우리의 운명은 하늘이 정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주의주의를 부르댄다. 단순한 빌런이 아닌 ‘그분’과 인간의 인식론의 충돌로 활용하는 센스!

성서에서 포도를 키우고 포도주를 마신 노아는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없었던 한 가지 일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러나 일라는 “그분이 당신을 선택한 건 이유가 있다. 인류를 구원할지 말지 선택권을 준 거다. 결국 당신은 자비와 사랑을 택했다”라고 바로잡아준다. 요즘 같은 때 정말 안성맞춤인 작품.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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