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2017년 1월 이후 3번이나 국내 개봉돼 373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작품이다. 그만큼 특정 취향에 부합하는 개성이 강하다는 의미다. 한 달 뒤면 1000년 만에 혜성을 볼 수 있는 도쿄와 깊은 산골 이토모리 마을.

이토모리의 여고생 미츠하는 여동생 요츠하와 할머니랑 산다. 아버지 토시키는 미야미즈 가문에 데릴사위로 왔지만 엄마가 요절하자 정치판에 뛰어들어 읍장이 된 후 가족과 떨어져 사는데 업자들과 결탁해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읍장 선거가 다가와 토시키는 유세에 나서지만 미츠하는 관심 없다.

그러던 중 꿈속에서 그녀는 도쿄의 동갑내기 남고생 타키의 몸에 들어가게 된다. 그건 타키 역시 마찬가지. 그렇게 서로 몸이 바뀌는 일이 반복되자 두 사람은 그게 꿈이 아닌 현실임을 깨닫고 서로 주의해야 할 금기사항을 만들기까지 한다. 어느 날 더 이상 몸이 안 바뀌자 타키는 여행을 간다.

미츠하의 몸에 들어갔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이토모리를 찾는 것. 천신만고 끝에 마을을 찾은 그는 깜짝 놀란다. 그곳은 3년 전 혜성의 잔해가 떨어져 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폐쇄됐던 것. 즉 미츠하는 3년 전 사망했고, 그는 사망 직전의 그녀와 교류했던 것. 그는 그녀의 불행을 막고자 나선다.

타임슬립은 더 이상 새로운 소재가 아니다. 할리우드의 ‘프리퀀시’부터 한국의 ‘동감’, ‘시월애’ 등 이젠 진부할 정도. ‘너의 이름은.’ 역시 타임슬립을 매개로 멜로드라마를 쓰지만 많은 관객을 사로잡은 건 아마 아름다운 비주얼도 영향이 컸지만 세월호 사건과 동일본 대지진이 연계되기 때문일 듯.

타키로부터 이토모리가 초토화될 것을 알게 된 미츠하는 친구들과 함께 이를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안전지대로 피신할 것을 계도한다. 하지만 토시키와 공무원들은 ‘안전한’ 집에서 대기하라고 주장한다. 6년 전 안전한 객실에 머물라던 안내방송과 더불어 대통령과 해경 등 일부 공무원이 연상된다.

타키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자신을 챙겨주는 선배 오쿠데라를 짝사랑한다. 타키의 몸에 들어간 미츠하는 오쿠데라와 서로 한 번씩 도움을 주고받은 뒤 데이트를 허락받는 데 성공한다. 숙맥인 타키를 도와주는 동시에 그토록 갈망하던 도쿄 관광을 하겠다는 속셈인 것.

그렇게 서로 도우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어느덧 마음속에는 연정이 싹트고 꼭 만나고 싶다는 열정이 피어오른다. 시간이라는 장애물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긴 하지만 미츠하가 혜성의 사고를 피하기만 한다면 한 공간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들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노골적으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앙리 베르그송을 차용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마르셀은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을 못 받은 기억으로 인해 성장해 여성에 대한 상실적 불안과 공격적 질투심이 생겼다. 타키의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도, 미츠하의 아버지도 모두 자식에게 무관심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에 대한 소설이다. 망각과 기억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끊임없는 시간의 상실에서-그러니까 이로써 과거와 습관을 상실하는 것에서―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소설이다. 그 대답은 기억에 있다”(‘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크리스티아네 취른트)

프루스트는 소설 속에서 베르그송의 ‘주관적 시간의 인지 이론’을 적용한다. 우리의 기억은 연대기적으로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타키는 “꿈은 기억은 안 나지만 뭔가 잃어버린 듯해”라고 읊조린다. 이렇듯 기억은 순차적인 게 아니라 뒤죽박죽이다. 예견되지 않고 절대 의지에 지배되지 않는다.

타키와 미츠하는 몸이 뒤바뀌었을 때 나름대로 생소한 현실에 잘 적응해간다. 하지만 제 몸으로 돌아왔을 땐 그전의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하기도, 편린적으로는 생생하게 기억하기도 한다. 뭣보다 가장 힘든 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어떻게든 기억하려 애쓰지만 이름이 생각 안 난다는 것.

타키와 미츠하의 노력으로 이토모리 주민들을 살린다는 변화는 감독의 동일본 대지진과 세월호 사건을 바로잡고 싶은 애달프고 간절한 마음이기에 이해는 가지만 영화 내내 보여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이론에 비춰볼 때 살짝 불편하다. 거의 모든 이론은 과거를 바꾸는 데 부정적이기 때문.

다수의 신화, 종교, 철학은 시간과 공간이 빅뱅 이후에 생겼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더해 하이데거는 ‘모든 현존재(존재자, 즉 나)는 ‘순수 지속’(베르그송에 의하면)이었던 본래적 존재가 퇴락한 존재자로서 죽음으로 인해 도래적 존재가 됨으로써 본래적 존재로 되돌아가는 시간성을 산다‘고 주장했다.

이와 여러 시간의 이론에 근거하면 이토모리 사건을 바꾸면 미래는 뒤틀릴 수밖에 없다. 시간이 어긋남으로써 공간,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생활이 어그러진다.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두 주인공의 ‘순수 지속’, 즉 ‘생명의 창조적 진화’(베르그송)를 매개로 한 사랑은 매우 숭고하다.

살짝 남존여비와 ‘시골 비하, 도시 찬양’ 사상이 엿보이는 게 불편하고, 굳이 자전거를 타는 미츠하의 팬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지 의아하다. 소녀들의 타액으로 담근 술을 신께 바친다는 설정 역시 일본 고유의 정서일지 몰라도 타국인에게 불편하긴 매한가지. 제목의 속뜻은 시간의 숨바꼭질!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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