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2015년 개봉돼 496만여 명이란 놀라운 흥행 성적을 거둔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경이롭고도 아기자기한 상상력이 펼쳐지는 동화지만 의외로 기억과 감정에 관한 철학이 꽤 심오하다.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는 기쁨, 슬픔, 소심, 까칠, 버럭이 존재하는 감정 컨트롤 본부가 있다.

미네소타의 11살 소녀 라일리는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동하며 자신을 사랑해 주는 부모와 함께 평화롭게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에 위기를 맞은 아빠의 투자 유치 문제 등으로 가족은 샌프란시스코의 허름한 집으로 이사한다. 새 환경은 라일리에게 미네소타에서의 추억이 더욱 그립도록 만든다.

다섯 감정들은 자신들이 관여한 라일리의 그날그날의 감정들이 담긴 구슬들을 핵심 기억 장기 저장소로 보낸 뒤 라일리가 잠들면 본부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한다. 저장소 지역엔 라일리의 꿈을 매일 연출하는 촬영팀이 있는가 하면 라일리의 추억과 감정에 의해 생긴 가족섬, 우정섬 등이 존재한다.

기쁨과 슬픔은 실수로 기억 구슬을 저장소로 보내는 자동 장치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남은 소심, 까칠, 버럭은 자꾸 감정의 소용돌이로 괴로워하는 라일리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버럭의 영향에 의해 그녀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아이스하키 오디션에 떨어지고 아빠와 크게 다툰다.

저장소에서 본부까지는 거리도 멀지만 각종 장애물도 많다. 라일리의 기쁨 기억 구슬을 챙겨 본부로 돌아가려 노력하는 기쁨은 그러나 낙담한 슬픔을 달래 함께 이동하는 것조차 버겁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라일리는 미네소타로 가겠다며 엄마의 신용카드를 훔치고 가족섬마저 붕괴되기 시작하는데.

제목이 ‘대외정책이 국내의 정치 등 국내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견해로서의 현상’이니 한 사람의 행동은 내부적 원인에 의해 결과물이 나온다는 인과론을 웅변한다. 다섯 감정은 3인칭으로 그려졌지만 사실은 1인칭 자아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본래적 존재에 가깝다. 그 흔한 내 안의 천사와 악마.

그러나 그 이원론은 만화적 장난기가 아니라 데카르트적이다. 그는 플라톤처럼 이성(정신, 마음)을 육체보다 우위에 뒀다. 다섯 감정은 사실은 라일리의 이성, 정신, 영혼, 마음, 사유, 의지, 판단 등이다. 라일리의 일탈은 그의 몸이 아니라 본부에서의 다섯 감정의 판명이나 오판이란 사고로 이뤄진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변하고 ‘내가 왜 그랬을까?’라고 괴로워하거나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고 합리화하곤 한다. 결과는 육체의 행동으로 완성되는 것이지만 즉흥적이든, 소여적이든, 감정적이든 그 명령은 모두 마음이 내리는 것이다. 감정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란 주제도 훌륭하다.

라일리의 부모는 설마 라일리의 내면에 든 다섯 감정이 그녀를 컨트롤한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라일리의 실체는 부모의 육안으로 보고 촉감으로 확인하는 육체인가, 아니면 본부의 다섯 감정인가? 물론 유물론자에게는 전자이고, 관념론자에게는 후자일 것이다. 감독 역시 후자다.

또한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과 인간생기론이 엿보인다. 그는 모든 동물을 자동 기계로 봤다. 다만 인간은 예외적으로 영혼을 갖고 있어 생기와 접촉함으로써 영혼과 육체 사이의 상호작용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닥터 감독은 마지막 쿠키에서 이를 살짝 뒤집는다. 그건 데카르트의 회의주의다.

‘몬스터 주식회사’, ‘업’, 최근의 ‘소울’까지 닥터 감독의 상상력과 사상의 결합은 매번 경이롭다. 라일리에겐 빙봉이란 상상 속의 친구와 잘생긴 연인이 있다. 그들은 모두 저장소에서 기쁨과 슬픔의 도우미 역할을 해 주며 자신을 희생한다. 어릴 때의 기억과 상상은 어른이 되면 지워진다는 은유다.

결론에 이르기 직전까지 슬픔과 버럭은 악역을 맡는다. 라일리가 위축되고 슬픔에 빠지게 되는 사달의 원인 제공자는 슬픔이다. 그리고 그걸 부모에 대한 반항과 가출이라는 일탈로 확장시키는 배경은 버럭이다. 그러나 그들은 악의로 그런 상황을 유도한 게 아니다. 실수였거나 잘해보자는 의도였다.

왜 감독은 감정 캐릭터를 만족, 욕심, 음흉 이런 것들로 설정하지 않았을까? 작품 속 다섯 감정은 결코 나쁜 게 아니라는 얘기다. 적재적소에서 사용함으로써 최선이 아닐지언정 그나마 차선은 만들 수 있고, 어느 경우에는 소심이나 까칠이 최선일 수도 있다는 복선이다. 슬픔이 바로 그런 결론이다.

빙봉의 눈물은 달콤한 사탕이다. 미네소타에 살 때 라일리는 결승전에서 진 게 슬펐고, 그 원인이 자기가 결승골을 못 넣은 데 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활짝 웃으며 저장소에 우정섬을 건설할 수 있었다. 상심에 빠져있을 것을 예상한 팀원들이 몰려와 위로해 줬기 때문이다.

슬픔은 부정적일지 몰라도 슬픔의 상징인 눈물은 의외로 카타르시스라는 큰 장점을 지녔다. 고대 그리스에서 3대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가 명성을 누렸던 건 그리스 사람들이 염세주의자여서가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항상 기쁘다면 그 기쁨은 기쁘지 않다는 교훈까지.

장 자크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감수성을 도덕의 기초라고 했다. 본부의 다섯 캐릭터가 바로 그 대표적인 감수성이다. 드니 디드로는 ‘인간 속성의 나약함’이라고도 했다. 냉철(까칠), 분노(버럭), 신중(소심), 회의(슬픔)도 중요한 감정이다. 꿈마저 감정의 연출이라는 재기 발랄한 도발까지 멋지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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