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한국-필리핀 합작 영화 ‘선샤인 패밀리’(김태식 감독)는 일본 미즈타니 도시유키 감독의 ‘뺑소니 가족’(1992)을 원작으로 한 블랙 코미디다. 필리핀 선샤인 여행사 서울 지사 차장 똔은 아내 쏘냐, 딸 샤인, 아들 맥스와 함께 산다. 이 가족은 한 달 뒤면 5년간의 서울 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할 예정.

접대가 있던 날 똔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음주운전하며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를 낸다. 한 젊은 여자가 차 밖으로 튕겨 나온 것을 보고도 겁이 나 그냥 집으로 도망친다. 그는 쏘냐에게 자수하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국땅에서 남편을 감옥에 보내는 건 가족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짓이라며 만류한다.

대신 그녀는 사고 차량과 똑같은 중고 차량을 구매해 마당에 주차한 뒤 문제의 차량은 집안에 들여놓고 해체해 띄엄띄엄 폐차장에 버리며 증거 인멸에 나선다. 샤인은 경찰 복무 중인 현우와 사랑에 빠졌지만 귀국해야 하기에 이별을 선언한다. 하지만 현우는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물러서지 않는다.

이웃집 치매 노인이 갑자기 집안에 침입하자 당황한 쏘냐는 얼떨결에 억류한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이 자동차 해체 작업을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인다. 며칠 전부터 쏘냐의 행동이 미심쩍어 주시해온 노인의 며느리 경숙은 남편에게 시아버지의 행방불명과 쏘냐가 연관이 있는 것 같다고 귀띔한다.

그다지 극적인 자극을 굳이 찾자면 뺑소니 사건의 반전이지만 전체적으로 블랙 코미디의 재미가 잔잔히 흐르면서 가족의 중요성을 강하게 설파한다. 똔과 쏘냐는 오랜 결혼생활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뜨겁다. 그런 만큼 자녀도 사랑한다. 다만 가족을 지키고 사랑하고자 하는 방식이 다를 따름이다.

쏘냐의 원더우먼 코스프레는 그 암시다. 의외로 아버지는 나약하고 엄마는 강인하다. 하지만 어느 게 옳은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샤인과 헤어질 수 없는 현우는 그녀의 집에 나타나고, 똔이 반대할 것을 뻔히 하는 샤인은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똔은 무작정 화내지만 쏘냐는 이해하고자 한다.

샤인은 페이크였지만 맥스는 진짜 게이였다. 여기서도 똔은 무작정 분노부터 표출하지만 쏘냐는 부드럽게 그 정체성을 납득해 준다. 아빠의 잘못에 대해 가족들이 자신의 어깨로 함께 감당하겠다며 차량 해체에 샤인까지 팔을 걷어붙일 즈음 모처럼 가족은 하나가 된다. 해체주의와 구조주의의 화해.

유물론과 관념론, 경험론과 합리론이 그래왔던 것처럼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는 대척점에서 오랫동안 대립해왔다. 구조주의는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의미가 결정된다고 본다. 그래서 관계망 내 사물의 위치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한다는 것. 똔이 자식들에게 분노한 이유다.

그가 보기에 샤인과 맥스는 자기가 꾸린 가정의 부분이지 독립된 개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샤인은 자기 말대로 연애와 결혼을 해야 하고, 맥스는 부부가 낳은 대로 남자여야 한다. 우리가 업무적으로 전화하거나 미팅할 때 홍길동이 아니라 모 회사, 모 부서의 홍 과장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듯.

해체주의는 대가족에서 분리된 핵가족마저 해체한 1인 가구다. 기존의 관습을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창출해나가는 개별자의 테넷이다. 그러나 모든 사상과 이론이 그렇듯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완벽하지 못하면서 어느 것도 소용없지 않다. 가족이 자동차를 해체하며 하나가 되는 게 그 증거다.

쏘냐가 아이들과 자동차를 해체하며 똔에게 “요즘 우리 애들 몇 년 만에 행복해 보여”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 마지막 화재 시퀀스는 다소 뜬금없기도 하고 억지스럽기도 하다. 단 외장을 뜯어 뼈대만 남은 자동차로 질주하는 시퀀스는 꽤 의미심장하다. 고정관념이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

허울이 중요하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탄력성 있게 변화해 가는 게 시대가 원하는 융통성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메시지다. 죄책감 탓에 피해자의 장례식장에 나타나 부조금 봉투를 내미는 똔과 유족이 그에게 “혹시”라며 내연관계가 아니었는지 의심하는 등의 블랙 코미디는 봐줄 만하다. 3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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