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나는 보리’(김진유 감독, 2018)는 강원도 주문진에서 농아인 아빠, 엄마, 초등학교 2학년 남동생 정우와 함께 사는 4학년 보리(김아송)가 주인공이다. 그들은 변변하게 가진 것도 없어 사는 게 불편할 법도 한데 불평불만 없이 네 가족이 오순도순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며 웃음꽃을 피운다.

가족 중 유일하게 듣고 말하는 보리는 전화 통화, 장보기, 은행 업무 등 가족이 외부와 소통하는 창구 역할을 해낸다. 그녀의 일상은 아침 등굣길에 사찰 앞에서 기도하는 걸로 시작된다. 친구 은정은 기도의 내용을 묻지만 보리는 답하지 않는다. 축구 신동인 정우는 곧 있을 풋살대회를 준비한다.

아빠는 밤에 어선을 타고 아침에 들어오는 어부다.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시작되는데 정우는 농아라서 후보로 전락했다며 풀이 죽는다. 보리가 은정에게 ‘소리를 없애달라고 한다’며 기도 내용을 털어놓자 은정은 자신의 MP3를 준다. 어느 날 보리는 TV에서 자주 잠수해 귀가 먹었다는 해녀를 본다.

MP3를 은정에게 되돌려 주고 기도마저 거른 보리는 아빠의 낚시터에서 바다로 몸을 던진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낚시 중이던 아빠가 구해주지만 보리는 소원처럼 소리를 잃는다. 보리는 은정에게 중국집을 하는 동네 이장인 그녀의 아빠에게 정우의 주전 자리를 감독에게 건의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마지막의 반전이 있기 전까지는 아주 평화로운 시골의 풍경수채화를 보는 듯 여유롭고 일상적이며 고운 얘기들이 잔잔하게 전개된다. 아빠가 실로 정우의 이를 뽑아 주면 정우는 그걸 지붕 위에 던진다. 보리는 수시로 휴일인 줄 모른 채 서둘러 등교한 뒤 아연실색한다. 방학 중 학교 청소하기 등등.

여경이 짜장면만 시켜 주자 왜 탕수육은 없냐며 투정 부리는 보리. 여경은 우리 식대는 1인당 5000원뿐이라고 해명한다. 보리는 은정네 중국집에선 1만 원이면 짜장면과 탕수육뿐만 아니라 군만두까지 동시에 준다고 도시의 야박한 인심에 서운해한다. 우리가 어릴 때 겪었던 ‘응답하라, 추억이여’.

보리는 왜 소리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할까? 그녀의 집엔 소리가 없다. 딱 보리 나이인 10살 때 후천적 농아가 된 엄마의 호흡 소리와 전화로 짜장면을 주문하는 보리의 언어 이외엔 묵음이다. 그러나 아빠, 엄마, 정우는 그게 지극히 자연스럽다. 보리만 집에 있으면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녀는 자신이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떠도는 섬 같았던 것. 그래서 은정에게 “아빠, 엄마, 정우는 행복해 보여”라고 말하지만 은정은 “난 부모랑 대화도 안 해”라고 부정한다. “너 임신했을 때 우리랑 대화가 안 될까 봐 걱정했는데 안 울어서 기뻤다. 우리랑 같으니까”라고 술회하는 엄마의 아이러니.

그렇다. 우리는 사소한 것마저도 양가성이 지배하는 이항대립의 이원론 속에서 살고 있다. 상대성 이론은 과학으로 그쳐야 하지만 인식론까지 깊게 파고들어 있다. 농아는 듣고 말하는 이를 부러워하지만 그들만의 세상에선 그럴 필요가 없다. 되레 농아의 세계(집)에서 사는 비농아 보리가 외로워한다.

이는 감독의 무리수가 아니라 장애인을 이해하고 배려하자는 강한 역지사지 테제. 보리가 정우와 함께 등교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만날 지각하기 때문. 게다가 그는 정문도 아닌 담을 넘어 들어가고 담임은 지각을 모른 체한다. 또 정우가 수업시간에 책상에 엎어져있건 먼 산을 바라보건 모르쇠다.

조부모는 아빠를 학교에 안 보냈다. “지금 정우는 괜찮지만 아빠 땐 밖에 나가면 무시당했기 때문”이라고 아빠는 설명한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우는 “안 들리니까 학교생활이 재미없고 어렵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그는 “선생님도 어려울 것”이라며 상대방을 배려한다. 첫째 눈물 포인트다.

“소리를 듣고 싶냐”는 보리의 질문에 “소리를 듣고 싶기보다는 친구들과 대화하고 싶어. 그들도 수어를 배우면 좋겠어”라고 답하는 정우.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다. 장애인은 그들의 장애가 힘든 게 아니라 부족한 배려와 차별이 불편한 것. 그들이 점자와 수어를 배우듯 우리도 노력하자는 테제!

그건 농아 딸을 뒀으면서도 수어 하나 안 배운 외할아버지에 대한 보리의 은근한 힐난으로 은유된다. 보리는 “그럼 엄마는 누구랑 놀았어?”라고 묻고 외할아버지는 “엄마는 이모랑 놀았지”라고 비겁한 변명을 해댄다. 참! 여기선 외할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로 호칭한다. 멋들어진 페미니즘의 배려.

게다가 어패류 잡아 파는 게 직업인 아빠는 낚시로 잡은 물고기는 방생한다. 이는 로크의 자연법을 말한다. 고모의 부추김에 힘입어 부모는 정우의 인공와우수술을 결정하지만 보리는 정우에게 거듭 “소리를 듣고 싶냐”고 묻는다. 고모는 수술하면 축구를 못 한다는 것을 숨겼지만 보리는 폭로한다.

신앙만 제거한다면 로크의 자연법과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보편적이며 편리한 사상과 처신법이 될 수 있다. 보리의 가족을 보라! 강남의 아파트도 아닌 야산의 허름한 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에 자족하며 살지만 그들은 가난이나 장애를 불편해하지 않고 외려 행복하다.

일부러 소리를 막았다가 다시 듣는 보리의 성장통은 다윈의 진화론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자연법을 따라 자연스럽게 살 때 그 세계가 가장 조화로운 세상’이라고 라이프니츠와 로크의 손을 들어준다. 짜장면 먹는 시퀀스로 소통에 관해 이토록 진한 감동을 주는 영화는 당분간 없을 만큼 감격적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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