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미녀와 야수’(빌 콘돈 감독, 2017)는 국내에서 51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을 만큼 반응이 좋았던 디즈니의 판타지 뮤지컬 멜로 실사 영화다.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아버지 모리스와 함께 사는 소녀 벨(엠마 왓슨)은 마을에서 유일한 책벌레로 그곳을 떠나 더 큰 세상에서 살고 싶은 꿈을 지녔다.

그런 벨을 사람들은 괴짜 취급하지만 발명가인 아버지는 끔찍하게 아낀다. 그녀가 갓 태어나던 파리 시절 흑사병이 창궐하자 감염된 엄마는 벨을 위해 모리스에게 멀리 떠날 것을 강권했고, 모녀는 그런 아픈 기억을 갖고 산다. ‘왕자병’에 걸린 미남 개스톤이 벨에게 반해 청혼하지만 거절당한다.

숲에 들어갔던 모리스가 길을 잃고 야수의 성에 간다. 몸을 녹이고 음식도 얻어먹을 생각이었지만 말하는 찻잔을 보고 경악해 뛰쳐나간다. 하지만 장미 한 송이를 가져달라던 벨이 생각나 돌아와 정원에서 장미를 꺾다 야수에게 들켜 감금당하고 말만 집으로 돌아가자 벨이 말을 타고 성으로 간다.

야수는 원래 이 성의 왕자. 호화로운 파티를 열자 한 노파가 궂은 날씨를 피해 성 안에 들어와 장미 한 송이를 건넸지만 왕자는 비루한 외양만 보고 홀대했다. 그러나 노파는 변장한 요정. 내면을 안 보고 겉모습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왕자에게 저주를 내려 야수로, 시종들은 식기와 집기로 변모시켰다.

그 장미의 꽃잎이 모두 떨어지기 전까지 진정한 사랑을 만난다면 저주에서 벗어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왕자와 모든 시종들은 영원히 지금 모습대로 살아야 한다. 벨은 성에서 아빠와 야수를 만나는데 야수는 그냥 갈 것인지, 아버지 대신 평생 갇힐 것인지의 선택지를 던지고 벨은 희생을 택한다.

식기와 집기들은 벨의 아름다운 외모를 근거로 야수가 사랑에 빠질 기회라며 드디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수군대며 야수를 부추긴다. 하지만 오랫동안 편견, 분노, 원망 속에서 살아온 야수는 벨에게 퉁명스럽거나 신경질적이고, 벨은 그런 야수에게 질린 데다 아빠가 걱정돼 탈출한다.

그렇게 말을 타고 도망친 벨은 숲속에서 늑대 무리를 만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이미 널리 알려질 대로 잘 알려진 얘기지만 이 영화는 일단 화려한 비주얼과 아름다운 노래의 뮤지컬 요소로 보고 듣는 재미를 충분하게 준다. 특히 집기들의 벨 환영 파티 시퀀스는 백미 중의 백미다.

이 작품을 별로 심각하게 고찰하지 않더라도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이 담겨있다는 건 초등학생도 알 수 있다. 야수 역의 댄 스티븐스는 빌런 개스톤 역의 루크 에반스보다 지명도가 약한 배우다. 게다가 그는 눈부신 미남이 아니라 유럽의 보편적으로 잘생긴 수준의 용모다. 영악한 캐스팅!

대신 왓슨은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답게 스크린을 빛낸다.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진 야수는 벨이 자신을 사랑해 줄 리 없다고 지레짐작해 낙담한다. 하지만 벨은 변화하는 그를 보고 “예전에 내가 보지 못했을 뿐 그에겐 뭔가 있어”라며 점점 더 빠져든다. 그들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는 서적이다.

‘사랑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며 ‘로미오와 줄리엣’을 인용하고 독서라는 공통점을 통해 마음을 연다. 야수는 ‘원탁의 기사’를 읽는다. 외형상 액션물 같지만 그 안엔 낭만적인 멜로도 담겨있다. 결국 이 영화는 대표적인 이항대립인 관념론과 유물론,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대치시킨다.

왕자는 가벼운 유물론자였다. 사랑을 안 믿고 오로지 외모와 조건만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속물이었다. 야수가 되고 나서도 별로 변한 게 없었다. 모리스를 단순히 도둑 취급하며 벨에 대해 ‘도둑의 딸에게 뭘 바라?’라고 하찮게 여겼었다. 게다가 시종들의 벨과 천생연분이란 의견을 반박했다.

야수가 되고 나선 철저한 피해의식과 염세주의에 빠졌다. 부정적인 회의주의자였다. 뭐든 미시적으로 봤고,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다. 반면에 벨은 낭만적 관념론자다. 비록 페스트가 창궐한 파리의 열악한 다락방에서 살았지만 세 식구가 함께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언젠간 마을을 떠날 것을 꿈꿨다.

그녀에겐 책이라는 좋은 벗이 있었으니까. 비록 현실은 답답할지라도 책을 통해 상상과 자유의 나래를 펼치며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살 의지를 불태웠다. 그녀에게 삶과 세상은 낙관적이었다. 야수에게는 경험상 인생은 험난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아플 때 아빠가 그를 데려가 비뚤어지게 만들었다.

개스톤은 아주 천박한 외모지상주의자이자 스노비스트(X폼 잡는 자)다.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뻐기는 그는 “위대한 사냥꾼은 토끼 사냥은 안 해”라며 웬만한 여자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야수가 있다는 모리스의 주장과, 야수가 외모와 달리 착하다는 벨의 주장을 교묘한 말장난으로 거짓으로 만든다.

그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4가지 우상의 편견론 중 ‘시장의 우상’이다. 마을의 관습과 전통을 지키자며 마을 사람들을 선동해 무기를 들고 성으로 진격하도록 만드는 ‘극장의 우상’이기도 하다. 야수는 성을 둘러싼 겨울 숲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벨은 “자유가 없으면 행복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벨을 통해 참 사랑을 깨달은 그는 그녀를 놓아준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자유를 주는 것이란 테제. 제 운명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명제도 숭고하다. 삼총사를 패러디한 코믹 시퀀스도 재미있고, 의외로 액션이 뛰어나며, 시종 중 흑백 커플을 설정한 것도 훌륭하다. 디즈니 중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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