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간이역’(김정민 감독)은 강력한 최루 멜로로써 시간과 기억을 얘기한다. 과거. 전북 남원의 같은 고교 동급생 지아(김재경)와 승현(김동준)은 풋사랑을 막 시작한다. 승현은 고교를 중퇴, 제빵사의 길을 선택했고, 지아는 대학교를 거쳐 서울에 취업했다. 27살의 현재. 그녀는 사내 연애 중이다.

사실 그녀는 2년 전 위암에 걸려 1년 동안 휴직한 채 항암치료를 받은 바 있다. 속이 안 좋아 사촌언니 은수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더니 재발했다. 은수는 또다시 그 힘든 항암치료를 받자고 강권하지만 지아는 이미 늦었음을 직감해 회사에 사표를 던진 뒤 남원의 홀어머니 집으로 간다.

가자마자 친구 혜선과 동천을 부른다. 승현과는 7년 전 다툰 뒤 연락을 안 하고 있었는데 눈치 없이 동천이 그를 불렀다. 그는 지아의 별명을 딴 도로시 베이커리를 운영 중이다. 두 사람은 처음엔 서먹서먹했지만 이내 예전처럼 다정한 친구로 지낸다. 은수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알린다.

2년 전 일도 몰랐던 엄마는 지아에게 미안해하며 치료를 받자고 재촉하지만 지아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둘은 9년 전 세상을 떠난 아빠의 납골당을 찾는다. 지아는 갑자기 승현에게 사귀자고 제안하지만 승현은 친구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승현은 우연히 지아가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안다.

이번엔 승현이 적극적으로 지아에게 결혼하자고 구애한다. 그러나 지아는 먼저 사귀자고 했던 건 장난이었다며 프러포즈를 거부한다. 자신이 먼저 떠나면 혼자 남겨질 승현을 배려하는 마음이었던 것. 그러던 어느 날 지아는 승현이 선천성 알츠하이머병으로 점점 기억을 잃어간다는 걸 알게 되는데.

기억이란 경험에 의해 축적되는 것이다. 경험은 지혜와 추억 같은 유쾌한 기억도, 때론 불쾌한 기억도 남긴다. 그래서 시간이란 게 있다. 좋은 기억은 애써 간직하려 하고, 나쁜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맡기기 마련이다. 그런 작용은 의지가 관여한다. 그런데 의지가 미치지 않는 알츠하이머병이라면?

승현은 지아에게 “내가 너를 기억하고 있을 때 연락해”라고 당부한다. 내가 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혹은 그와 나와의 관계를 모른다면 그를 만나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억은 의식이 붙잡을 수 있고, 무의식에 갇혀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의식과 무의식의 빗장은 풀린다.

승현은 처음부터 지아를 사랑했고, 그녀를 원했지만 언제 그의 뇌리에서 그녀가 사라질지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 그녀를 물리쳤던 것이다. 지아는 바쁜 서울 생활 탓에 일시적으로 그를 잊었고, 새 연인도 생겼기에 기억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암 발병을 계기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자신의 추억 속에 승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걸 알기에 그럴수록 혼자 남겨져 슬퍼할 그가 안쓰러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녀에겐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그런데 승현에게도 시간이 없었다.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기억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두 사람에게선 앙리 베르그송이 읽힌다. 그는 유심론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진화론을 바탕으로 창조적 진화를 주장하고, 생의 비약을 주창했다. 지아의 생명과 승현의 기억의 생명력이 몇 달 안 남은 게 뭔 상관인가? 중요한 건 그들이 사랑한다는 게 아닌가? 마음이 최고지 육체나 물질이 아니다.

몇 년을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진화하며 사느냐라는 생의 비약이 중요하다. 또한 연대기적 삶을 살 게 아니라 ‘순수 지속’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삶의 의미는 새로운 기억이 쌓이면 맨 밑의 기억 하나가 지워지는 연대기가 아니다. 베르그송은 의식의 고유한 시간은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다고 했다.

베르그송의 순수 지속에서 과거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현재로 흘러듦으로써 현존재를 풍성하게 만든다. 자신의 가슴속에 우주가 있다는 지아는 유심론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차안에서 벗어나 피안의 열반으로 가는 불교도 엿보인다. 삶을 기계론이 아닌 목적론으로 보는 훌륭한 시각! 내달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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