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딥 임팩트’(미미 레더 감독)는 23년 전에 개봉된 재난 영화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술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시대를 앞서갔다. 야심에 찬 방송사 여성 앵커 제니 레너(테아 레오니)는 재무부 장관의 사임 건을 조사하다 그의 비서로부터 엘리란 이름을 듣고, 섹스 스캔들을 우려한 사임으로 추측하고 특종 냄새를 맡는다.

집요한 취재를 계속하던 그녀는 대통령 벡(모건 프리먼)이 소집한 비밀회의에 불려가게 되고, 그녀가 엘리란 기밀사항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벡으로부터 공식 발표 전까지 함구한다는 조건하에 엘리 건의 독점 취재를 제안받는다.

엘리란 인류 종말적인 대사건(혜성 충돌)을 칭하는 국가 암호였던 것. 1년 전 발견된 이 혜성은 현재 지구와 충돌 궤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뉴욕시 크기에 무게는 5000억 톤이다. 충돌 예상일은 8월 16일이고, 지점은 대서양이 될 것이다.

지난 8개월 동안 미국 정부는 이 혜성을 파괴하기 위해 러시아와 합작으로 우주선 메시아호를 제작했고, 2개월 뒤 우주로 쏠 계획을 세운다. 메시아호의 지휘를 맡은 전역 우주 비행사 키니(로버트 듀발)는 아무도 다가가 본 적 없는 혜성을 폭파해 궤도를 변경시키라는 임무를 받는다.

그러나 혜성은 두 조각이 났을 뿐 궤도 변경은 일어나지 않고. 3시간 차이로 지구를 향해 오는 두 혜성의 충돌 시 지구에 가해질 충격은 예측불허다. 벡은 혜성 공격의 실패를 알리며 마지막 인류 생존의 계획을 발표한다. 미주리 주에 노아의 방주처럼 인류 100만 명 및 각종 생명체가 2년간 살 수 있도록 지하 요새를 만들어놓았고, 미리 선발한 인재 및 불특정 선별자들을 이곳으로 대피시키겠다는 것.

지금까지 재난 영화는 한 건물, 배 한 척, 혹은 커봐야 한 도시가 배경이었지만 이 작품은 지구의 생몰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스케일이 다르다. 그런 만큼 내용도 꽤 심오하다. 주제는 한 마디로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다. 이 세상에는 매일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내 삶은 크게 변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나로선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지만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세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벡은 “저는 신을 믿습니다. 그렇지 않은 분도 있지만 생존을 위해선 기도해야 합니다. 신은 안 된다고 답할 때도 있지만. 신께서 지켜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플라톤은 기독교가 발생할지 알고 영혼불멸 등을 외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와는 사뭇 달랐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이란 상징적인 존재였다. 어쩌면 신과 별도로 자연에 관여하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다이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신의 섭리는 자연적인 원인과 작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존재했다.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두 혜성은 이 넓디넓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 중의 지극히 부수적인 소소한 사건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에겐 멸종의 위기다. 만약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전멸된다면? 그래도 ‘우주의 삶’은 계속된다. 제니의 아버지는 제니보다 두 살 많은 클로이랑 재혼했고, 엄마는 이혼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클로이가 떠나자 아버지는 비로소 인생을 깨닫는다. 그는 결혼해 아이를 낳는 순간 남자로서 살기보다는 아버지나 가장으로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제니가 “난 고아인 것 같아”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그녀가 고아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새사람이 된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연의 과오나 무익한 현상은 목적의 형성력에 저항하는 질료적 특성에 의해 발생’한다(윌 듀랜트). 즉 혜성과 지구의 충돌은 우연이 아니다. 지금까지 지구에는 무수한 운석이 떨어졌고, 커다란 혜성이 부딪친 적도 있었다.

그의 자연학과 생물학에 의하면 낡은 대양과 대륙이 소멸해야 새로운 대양과 대륙이 생긴다. 오래된 생명체가 죽어야 새 생명체가 태어난다. 순서는 바뀔 순 있지만 번영과 퇴영, 성장과 붕괴, 수축과 팽창은 항상 붙어다니는 양가성이고, 그 안에서 세상은 중용으로 가기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 벡이 세운 작전은 모두 실패한다. 그렇다고 인류가 멸종되거나 지구가 먼지가 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지구 일부의 피해와 숭고한 영웅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는 것도, 전부 멸절하는 것도 아닌 중도의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 죽어간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겠다고, 조금이라도 더 풍족하게 살겠다고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지만 사실 삶이란 게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이 작품은 어떻게 사느냐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를 웅변한다는 점에서 재난 영화의 수작으로 손꼽기에 모자람이 없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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