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기타노 다케시 감독, 주연의 ‘하나비’는 1997년 제5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대한민국에서 개봉된 최초의 일본 영화라는 점에서 유명한데 그 유명세만큼 화려한 영상미와 전편에 걸쳐 흐르는 비장미, 그리고 다케시 특유의 허무주의적 유머가 돋보인다.

죽마고우인 니시(기타노)와 호리베(오스기 렌)는 파트너 형사로 근무한다. 니시는 일찍이 딸을 잃고 아내가 백혈병에 걸려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잠복근무 중 호리베가 니시에게 입원 중인 아내에게 가도록 배려한 사이 호리베는 범인의 총에 맞아 하반신 불구가 돼 아내와 딸에게 버림받는다.

후에 범인을 만난 니시가 서두르는 사이 후배 형사 다나카가 목숨을 잃자 분노한 니시는 범인에게 총을 난사한다. 복합적인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니시는 사직서를 내고 야쿠자에게 사채를 빌려 그림을 낙으로 사는 호리베를 위해 화구를 사 주고, 다나카의 미망인에게 생활비를 보태 주며, 아내의 치료비를 댄다.

그러나 빚 독촉에 시달리자 은행을 털어 빚을 갚은 뒤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신문에서 은행 강도 기사를 접한 야쿠자 보스는 니시의 돈을 빼앗기 위해 부하들을 이끌고 그를 추적하고, 후배 형사 나카무라 역시 그를 검거하기 위해 따라붙는데.

니시와 호리베에겐 내내 허무주의가 넘쳐흐른다.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에서 파생된 실패에 대한 암묵적 인정과 에피쿠로스학파의 (정신적)쾌락주의가 낳은 긍정적 패배주의가 넘실댄다. 부부는, 가족은 가장 어려울 때 곁에서 위로와 도움이 되라는 관계인데 호리베가 불구가 되자 아내는 딸을 데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어릴 적 바닷가에 살았던 호리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도 안 남자 그 드넓은 바다의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가 그린 그림은(실제로는 다케시가 그림) 사람을 포함한 각종 동물의 몸에 꽃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베레모라도 쓰면 그림이 잘 그려질까?”라고 읊조린 바 있다.

이 동물과 꽃의 혼혈은 몸뚱이는 천박해도 얼굴만큼은 아름답고 싶은 인간 군상의 현실과 희망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곧 죽는다. 사는 동안 그토록 아름답게 가꾸고자 화장품을 바르고, 운동을 하며, 옷으로 치장했던 우리 육신은 악취를 풍기며 썩을 것이고 결국 한 줌의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꽃은 시들어도 더럽지 않다. 외려 말려서 영원히 보존하면서 보고 즐길 수도 있다. 니시의 아내는 시든 꽃을 꽂은 병에 부지런히 물을 담는다. 그건 꽃을 살리겠다는 게 아니라 병으로 시든 자신의 육신에 담긴 영혼에 영생의 샘물을 주는 상징적 행위다. 육체는 곧 썩겠지만 영혼만큼은 불멸하고픈 마지막 욕망이다.

호리베의 베레모와 그녀의 시든 꽃에 물 주기는 유물론을 거부하고픈 주관적 관념론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나무 조각 퍼즐을 맞추지만 어떤 글도, 형상도 만들지 못하다가 결국 ‘5’자를 그린다. 고대 그리스의 엠페도클레스의 우주론은 물, 불, 공기, 흙의 제4원소였다. 여기에 활기찬 영적 에너지를 더해 제5원소론이 나왔다.

5는 인간을, 인간의 생명력을 뜻한다. 유교는 음양오행설이 있다. 사람의 감각은 오감이고, 입맛은 오미다. 오각형 별은 사지를 뻗은 인간의 몸을 의미하고 사람의 한 쪽 손가락과 발가락은 각각 5개다. 힌두교의 최고 신 시바의 얼굴은 다섯이고, 불교의 여래도 다섯이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 진정한 인생을, 영생을 깨달았다.

니시는 아내와 호리베가 겪는 상실과 고통의 총화다. 니시와 호리베는 고교 때 역시 친구 사이인 각자의 아내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했다. 니시는 4살 된 딸을 잃었고, 그 통증은 아내의 암세포로 육화했다. 그런 니시를 걱정했던 호리베는 홀몸도 아닌 반몸이 됐다. 이제 니시는 그들과 다나카의 원죄를 오롯이 짊어졌다.

그는 의식이 옹호해 주지 않는 의지는 창백한 욕망의 허영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적당히 형사 생활을 하며 살 수도 있는 얄팍한 타협을 거부하고 내면의 사색과 혈관의 분노가 이끄는 대로 사표를 던지고 은행을 털며 닥치는 대로 총질을 해댄다.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그건 주의주의(의지)가 아니라 주지주의(지혜)다.

마지막 시퀀스는 ‘기타노 블루’라는 별명에 걸맞게 해변에서 펼쳐진다. 니시는 한 소녀의 연날리기를 돕지만 실수로 연을 찢고 만다. 아내는 말없이 그냥 쳐다만 본다. 먼발치서 이를 바라보는 나카무라는 파트너에게 “난 저런 인생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뇌까린다. 당연하다. 니시는 삶 자체를 초월함으로써 죽음을 승화시켰으니.

해변에 두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진다. 소녀의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연이 끝내 하늘을 날지 못하고 찢어지는 건 삶의 무게 앞에선 부자도 빈자도 결코 자유로운 인생일 수 없다는 것. 아내는 ‘고마워요, 미안해요’라고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하나비는 불꽃놀이다. 하나는 꽃, 비는 불이다.

꽃은 인생, 사랑, 영생을, 불은 폭력, 비극, 죽음을 의미한다. 삶은 잔인하고 인생은 허무하다는 이 쇼펜하우어적 발상. 그는 살고자 하는 욕망은 고통을 유발하고 죽음을 앞당길 뿐이라고 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가 순순히 독배를 받아들이는 데서 비극과 희극을 동시에 봤듯 다케시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의 형이상학을 희비극의 누아르로 그린다. 전 세계의 극찬이 과찬이 아닌 걸작!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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