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소통의 부재로 인한 갈등과 오해, 그리고 영원한 노스탤지어인 어머니의 자궁에 대한 그리움을 먼지 풀풀 날리는 황량한 사막지대에서 라이 쿠더의 끈적끈적하고도 처연한 기타 현으로 표현한 ‘파리, 텍사스’와 영화적 모든 예술과 철학을 통해 유물론의 손을 들어준 ‘베를린 천사의 시’로 유명한 빔 벤더스 감독.

‘에브리띵 윌 비 파인’(2015)은 대놓고 오즈 야스지로, 프랑수아 트뤼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종합을 시도한 위대한 예술가 벤더스의 비교적 쉬운 드라마다. 그는 많이 따뜻해졌고, 대중적 취향을 배려하고자 한다. 작가 토마스(제임스 프랭코)는 운전 중 어린 크리스토퍼와 니콜라스 형제를 친다.

크리스토퍼는 멀쩡하지만 니콜라스는 사망한다. 형제는 삽화 작가인 홀어머니 케이트(샤를로뜨 갱스부르)가 키우고 있었다. 케이트와 크리스토퍼는 나름대로 아픔을 이겨내고 살아가려 안간힘을 쓴다. 토마스는 죄책감에 자살을 시도하지만 살아나고 병원에 아내 사라(레이철 매캐덤스)가 나타난다.

토마스가 글을 쓴다는 이유로 떨어져 살았지만 사실 그들은 사이가 안 좋다. 헤어질지, 관계를 회복할지조차 갈팡질팡할 정도로 악화됐다. 토마스는 케이트에게 무슨 일이든 돕겠다고 약속한다. 웬일인지 그 사건 후 토마스의 원고는 쭉쭉 나아가고 2년 후 드디어 그는 히트 작가의 반열에 오르는데.

두 가지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째는 영화 예술가인 벤더스의 자아비판 혹은 자기폭로다. 교통사고 전까지 토마스는 하루에 두 장도 못 쓰던 미완의 작가였다. 얼음 낚시터의 가건물 안에서 글을 쓰던 그가 낚시꾼에게 “글이나 낚시나 안 풀리는군”이라고 말한 데서 그의 능력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사고로 영감을 받은 뒤 달라진다. 그야말로 거미가 줄을 뽑듯 글이 술술 풀리는 것. 그가 갑자기 집에 찾아오자 케이트는 “영감을 얻으러 왔나요?”라고 묻는다. 토마스가 “예술가네요”라고 말하자 케이트는 “그저 돈 받고 주문대로 그릴 뿐”이라며 자신의 통속성을 인정하지만 토마스는 스스로 예술가라 자만하고 있다.

사라와 이혼한 그는 외동딸 미나와 홀로 사는 출판사 직원 앤과 연애를 시작하더니 동거에 들어간다. 셋이 놀이공원에 놀러 갔는데 놀이기구 사고로 한 여성이 다치자 토마스는 매우 침착하게 그녀를 구조하는 데 앞장선다. 이를 보고 앤은 놀라 당황한 다수의 사람들과 다름에 대해 의아하게 여긴다.

그렇다. 그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다. 사고 직후 그는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병원을 찾은 사라는 죽기엔 약 복용량이 터무니없이 적었다며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말한다. 그는 괴로움에 죽고자 했던 게 아니라 자책하고 있다는 쇼를 벌임으로써 여론의 면죄부를 얻으려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예술가를 자처하고 그런 자긍심으로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지만 남들의 불행에서 모티프를 얻는 사악한 창의력으로 독자들을 현혹하는 통속적인 장사꾼일 따름이다. 마지막 시퀀스 때 16살 대학생으로 성장한 크리스토퍼가 매우 난해한 표정인 데 반해 그는 악마의 미소를 짓는다.

또 다른 해석은 숙명론이다. 사고 후 케이트는 크리스토퍼를 데리고 교회에 간다. “제발 도와주세요. 혼자선 못 하겠어요. 뭔가 희망이 보이는 듯하다가도 다 포기하고 싶기도 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기도 해요”라며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토마스를 위한 기도도 잊지 않는다. 그녀는 토마스를 원망하거나 미워할 수 없었다.

왜? 그게 다 신이 만든 예정조화(라이프니츠)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고 당시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아주 재미있어서 아이들에게 들어오라고 얘기하는 걸 깜빡했다. 아니, 어쩌면 ‘조금만, 조금만’이라며 아이들을 챙기는 걸 미뤘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게 신의 뜻이었다고 자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일견 변신론자이자 낙관주의자인 라이프니츠 추종자처럼 보이지만 프랑스 철학자 알랭에 더 가깝다. 그는 “비관주의는 기분의 산물이고 낙관주의는 의지의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잘 판단하는 것은 잘 행위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그는 지성과 의지가 밑받침된 이성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봤다.

토마스는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와 낙관론에 매우 가깝다. 영화의 시작은 폭설이 쌓인 한겨울이지만 토마스의 성공 이후는 내내 녹음이 우거진 계절이다. 토마스는 케이트에게 자신은 소설을 쓰고 싶지만 사라는 아이를 낳자고 해서 갈등한다고 속내를 털어놓았지만 그건 거짓말. 그는 아이를 못 낳는다.

중간에 세인트 필로메나란 마을 간판이 나온다. 동정녀 필로메나는 중재의 상징이다. 신자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좋게 해결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게 이 성녀의 역할이다. 케이트는 니콜라스를 살려달라고 헛된 기도를 하지 않는다. 다만 신이 그런 고통을 준 데도 다 이유가 있다고 보고, ‘이 또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영화는 치유에는 인내의 기다림이, 시간이 필요하다고 웅변한다. 여백의 미학으로 인내를 인유한다. 케이트와 크리스토퍼는 말수가 거의 없다. 인서트로 삽입된 그들의 짧은 일상에선 대화가 없다. 토마스는 케이트의 집을 찾을 때마다 집 앞까지 가지 않고 멀찍한 곳에 차를 세운다. 카메라는 걷는 그를 내내 따른다.

케이트가 책 한 권을 건네자 토마스는 “저는 종교가 없다”며 거절한다. 케이트는 “그래도 봐라. 우리를 위한다면”이라며 끝내 선물한다. 한밤중 케이트는 토마스를 부른다. ‘우리를 위한 추도식’이라며 사고 당시 읽었던 책을 찢어 불태운다. 토마스에게 “포크너 좋아해요?”라고 질문하면서.

토마스는 “작가한테 관심 없다”고 말한다. “글 쓰는 일엔 모순이 없을 수 없다. 사는 데 괴로움이 글의 원천”이라는 그는 히트 작가이긴 하지만 정통이 아니라 사이비 예술가다. 포크너는 폭력, 잡혼 등을 통해 휴머니즘을 추구한 역설적 작가다. 토마스는 그와 대척점에 선 싸구려 작가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는 토마스의 집에 침입해 침대에 오줌을 싼 뒤 도망가지 않고 주변을 배회하다 토마스 앞에 나타난다. 밤새 얘기를 나눈 둘은 아침에 함께 매트리스를 마당에 옮기면서 화해를 한다. 크리스토퍼는 자그마한 복수와 더불어 작가의 영역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고, 토마스는 비로소 그를 인정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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