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웅: 천하의 시작’(장이머우 감독, 2003)은 영화 자체로는 뛰어난 무협물이자 아름다운 여러 폭의 수채화, 수묵화이지만 정치적 의도는 매우 음흉한 괴작이다. BC 3세기 막강한 일곱 국가들이 군웅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천하를 통일하려는 진왕 영정(천다오밍)은 조나라 세 자객의 위협에 전전긍긍한다.

그들은 불세출의 고수 장천(전쯔단), 파검(량차오웨이), 비설(장완위). 어느 날 무명(리롄제)이라는 시골의 하위 관리가 세 명을 죽였다며 그들의 무기를 들고 입궁한다. 지금까지 자신의 100보 앞에 아무도 들여놓은 바 없는 영정은 무용담을 듣기 위해 무명을 10보 앞까지 바짝 다가오게 만든다.

무명은 지난 10년간 필살의 검법을 익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제일의 고수인 세 사람을 죽이기 위해 질투심을 이용했다며 무용담을 털어놓는다. 파검과 비설은 연인 사이이지만 비설이 장천과 바람을 피웠다. 그래서 무명은 그 사실을 파검에게 알리고 장천 먼저 제거했다.

그 후 파검과 비설의 갈등을 유발함으로써 비설이 파검을 죽이도록 유도했고, 마지막으로 조나라를 파멸시키려 출군한 진 군대의 진영에서 비설을 죽였다고 설명한다. 물론 진의 고수들과 군인들이 증인이었다. 3년 전 파검과 비설은 진의 궁을 급습했고, 비설이 친위대를 막는 사이 파검이 영정을 죽일 기회를 잡았지만 살려 준 바 있다.

당시의 상황과 두 사람의 됨됨이에 대해 잘 아는 영정은 무명의 무용담이 거짓이라며 자신의 의견을 조목조목 늘어놓는데. 이 영화의 값어치는 일단 리, 장, 량, 전, 그리고 파검의 하녀 여월 역으로 등장하는 장쯔이 등 중국 최고의 스타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또한 무협 영화로서의 재미도 최고이다.

더불어 그 무협 신 하나하나가 웬만한 명화를 방불케 하는 하나의 예술 작품에 다름없다는 것 역시 뛰어난 작품성을 입증해 준다. 무명은 장천을 제거하기 위해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고택에 등장한다. 그리고 두 고수는 맹인 악사의 현악기 연주에 맞춰 실제가 아닌, 두뇌로 대결을 펼친다.

파검과 비설의 갈등은 결국 비설과 여월의 결투를 야기한다. 두 여성의 대결은 온통 노란 나뭇잎으로 휩싸인 숲에서 펼쳐진다. 비설은 턱없이 부족한 실력을 지닌 여월을 봐주지만 어긋난 애정과 질투심에 눈이 먼 여월은 눈에 보이는 게 없어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무모하게 덤벼든다.

결국 여월이 비설의 칼에 맞을 즈음에는 스크린은 온통 붉은 나뭇잎으로 가득하다. 두 여인이 나무 위를 나는 시퀀스는 ‘와호장룡’의 오마주의 느낌이 짙다. 세 번째는 수묵화의 산수화이다. 모든 과정을 완수하고 이제 영정을 만날 일만 남은 무명은 파검을 배려해 그와 마지막 대결을 벌이기 위해 호수로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이 물 위를 날며 펼치는 검술 대결은 와이어 액션의 최고봉임을 떠나 한 편의 아름다운 발레 공연을 연상케 한다.

장이머우는 색을 잘 쓰기로 유명한 감독인데 이번에도 그의 장기는 관객들의 눈을 호강시킨다. 그리고 그 색들은 모두 유의미하다. 무명은 시종일관 검은색 의상이다. 마지막 밤을 보내는 파검과 비설은 파란색 옷을 입고 있다. 비설과 여월은 대결 때 각각 빨간색과 주황색 의상을 입는데 그건 무명의 거짓말이고 사실은 흰색 옷을 입는다.

파검과 비설의 과거는 녹색 의상, 비설의 고향은 심지어 강의 색까지 모두 녹색이다. 비설이 파검을 찌를 때의 옷은 파란색. 영정의 궁에는 초록색 휘장들이 걸려 있다. 그야말로 총천연색의 향연이다. 무명은 진나라에서 자랐지만 철이 들자 진의 군대에 부모가 죽임을 당한 뒤 진으로 입양된 조나라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복수를 꿈꿔 온 것. 그가 10년간 수련한 무술은 10보 필살 검법. 10걸음 안의 사정거리에 들어온 상대방을 빛보다 빠른 속도로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쾌검술이다. 파검은 자신이 3년 전에 영정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단 두 글자로 보여 준다.

天下. 그에 앞서 파검이 무명에게 써 준 劍이라는 글을 한참 바라보던 영정은 말미에서야 그 속에 담긴 심오한 뜻을 깨닫는다. 글은 검에 못지않은 힘을 지녔지만 결국 상대를 해치지 않는, 모든 걸 포용하는 마음이다. 곧 살생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게 글과 검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

당시 중국은 7개국이 하루도 빠질 날이 없이 전쟁을 벌이는 통에 백성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희생되는 난세였다. 파검이 깨달은 건 더 이상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이 신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 전쟁을 하루빨리 끝낼 인물이 영정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만약 영정을 죽인다면 대륙은 다시 전란에 휘말릴 것이며 백성들은 영원히 도탄에 빠져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결론 끝에 칼을 거둔 것이었다. 파검과 비설은 이름을 바꾼 채 서당에 은거하며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파검은 글의 힘을 믿었다. 영정은 천하를 접수해 하나의 문자로 통일하려 했다.

한때 정부에 반항적이었던 장 감독은 이 작품으로 중국의 중화사상과 동북공정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중국의 소수 민족 학대와 정복,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의 왜곡 등을 생각하면 불쾌하지만 영화 자체로서의 완성도와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이라는 철학만큼은 거창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는 크레타의 미노스 왕에게 패해 매년 미노스의 괴물 아들 미노타우로스에게 젊은 남녀를 제물로 바쳤다. 그러자 왕자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희생양을 자청한다. 결국 테세우스는 임무는 완수하지만 실패를 뜻하는 색깔의 깃발을 달아 오늘날 에게해의 이름 탄생에 기여한다. 비설과 하인의 깃발 시퀀스는 그걸 오마주 했다. 長天(무한한 하늘), 破劍(검을 깨다), 飛雪(눈이 날리다), 無名(이름 없음) 등은 세상 모든 욕심과 다툼이 무의미함을 뜻한다. 감독 버전으로 지난해 재개봉되었지만 단지 러닝 타임만 10분 늘어났을 뿐 극장판과 별로 다르지 않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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