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무비&철학] 자식에 대한 실망의 결과는 어머니는 자책과 연민이지만 아버지는 분노와 포기라는 비유이다. 엄청난 정치 풍자 혹은 조롱도 담겨 있다. 너구리 같은 재순도, 신선한 종찬도, 그 주변 인물들조차도 결국 모두 개인적 성공에 눈먼 속물들에 불과하다.

종찬의 오른팔인 사무 국장은 예전에 재순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경찰의 수사 일지를 구해 달라는 연홍의 명령을 불법이라고 단호하게 거부하지만 종찬의 지지율이 급상승하자 서슴없이 거래를 통해 입수해 건넨다. 배경은 나름대로 신도시인데 분위기와 색감은 칙칙하고 어둡고 음산하다.

각 시퀀스의 전개는 도무지 한숨 돌릴 틈을 안 주며 긴박하게 돌아가고 매 쇼트와 대사 하나, 단역 배우 한 명마저도 집중하게 만드는 흡입력이 뛰어나다. 민진은 학교에서 ‘왕따’였다. 미국에서 살다 왔다고 영어를 구사하고, 부유하기 때문에 명품 시계를 차고 다녔기 때문이다.

미옥은 처음엔 그런 민진이 혐오스러웠다. 그런데 자가용 운전기사로 일하는 아버지가 모시는 오너가 종찬임을 알고는 반감보다 더 큰 주눅이 앞으로 밀고 나왔다. 미옥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외동딸인데 어느 날 아버지가 새 장가를 들어 이복동생을 넷이나 낳았다.

좁아 터진 집안엔 할머니까지 함께 살아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세상은 그녀에게 꿈 많은 소녀가 되기를 강요하지만 환경은 외진 구석으로 몰아 넣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민진에겐 더 큰 아픔이 있었다. 그래서 두 소녀는 펑크 밴드를 결성했다.

그들은 직접 ‘와일드 로즈 힐’(찔레꽃 언덕, 주제곡)이라는 곡을 써서 또래 아이들과 소통하는 가운데 자기들만의 세계(공간)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찔레는 전국의 산, 들, 계곡 등 자연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야생풀로 등산객에게는 귀찮은 존재이다.

하지만 꽃부터 뿌리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훌륭한 식용 풀이자 약재이다. 산의 주인이 자신인 줄 착각하는 다수의 등산객(기성세대, 기득권층)은 이 하찮은 들풀(청소년의 꿈)이 성가시다며 가차 없이 짓밟거나 심지어 제거한다.

자연의 모든 것은 저마다의 탄생과 생존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그게 삼라만상의 이치인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오만에 빠져 있고, 어른들은 젊은이들의 꿈을 무시한 채 노후 대책이란 명목으로 이기심만 불태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문화와 문명이겠지만 우월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사랑이고 정서이다. 하찮은 찔레꽃에조차 존재의 이유를 인정해 줄 때 사람의 주도권과 문명의 찬란함은 비로소 사랑으로 인해 우뚝 설 수 있다고 펑크 록처럼 기괴하게, 때론 잔혹한 동화처럼 서늘하게 절규한다.

“악마는 멀리 있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그 누군가이다.”라고 열변을 토한다. 그건 어긋난 욕망이다. 손예진의 연기는 불꽃이 튄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이다. 고 김주혁의 빛나는 연기는 '독전' 이전에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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