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아무리 ‘킬링 타임’이 목적일지라도 장이머우 감독에 맷 데이먼, 류더화 출연이라는 이름에 현혹되면 ‘그레이트 월’을 선택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윌리엄(맷 데이먼)은 어릴 때 군에 포로로 잡힌 후 유럽 전역의 전쟁터를 떠돌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신궁이다.

그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검은 가루’를 얻고자 페로(페드로 파스칼)와 함께 중국 북부까지 왔다 산적에 쫓겨 만리장성에 도착한다.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무명수비대라는 특수 군대가 60년 만에 나타날 정체불명의 괴물 타오티에와의 결사항전을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을 지키는 핵심 인물은 여장군 린(징티안)과 책사 왕(류더화). 두 사람은 20년 전 윌리엄과 같은 목적으로 잠입했다 눌러앉게 된 발라드(윌렘 대포)로부터 영어를 배운 덕에 윌리엄과의 대화가 순조로웠다. 윌리엄과 페로는 타오티에와의 전쟁에서 맹활약을 펼쳐 신임을 얻게 된다.

이기적이고 오로지 탐욕에 눈이 멀었던 윌리엄은 린과 병사 등 무명수비대의 신뢰로 똘똘 뭉친 희생 정신과 동료애에 감동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타오티에와 싸워 목적대로 한 마리를 생포한 끝에 그들이 자석에 약하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수비대에 알려 준다.

하지만 페로와 발라드는 생각이 달랐다. 두 사람은 ‘검은 가루’를 훔쳐서 지긋지긋한 타국에서의 고생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주지육림에 파묻히고 싶었던 것. 그런 그들의 배은망덕한 배신을 막으려던 윌리엄은 역공에 쓰러지고 린은 그를 오해해 감옥에 가둔 뒤 페로를 잡기 위해 추격대를 보낸다.

그러나 이들이 내부 갈등을 겪는 사이 의외로 영악한 30만 마리의 타오티에는 땅굴을 통해 만리장성을 통과해 황제가 사는 도성을 향해 전력 질주한다. 이제 6시간 뒤면 중국 본토가 점령당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인류가 타오티에에게 전멸당할 판이다.

20만 개가 넘는 벽돌을 사용해 건축한 성벽 세트와 1만 여벌의 갑옷 세트는 실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엄청난 스케일이다. 이미 ‘붉은 수수밭’, ‘홍등’, ‘연인’ 등에서 얼마나 화려하고 섬세한 색채 감각을 지녔는지, 그리고 광활한 중국 천혜의 자연 풍광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충분히 보여 준 장 감독의 전매 특허는 여전하다.

검은색의 보병, 빨간색의 궁사, 파란색의 여군 등으로 각각 색으로 구별한 수비대의 정체성과 난무하는 신비로운 창, 칼, 톱날 등의 다양한 무기는 고증 여부를 떠나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특히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성밖 타오티에의 무리 속으로 날아가 적을 죽이거나 희생되는 여전사들의 활약과 린의 당당함은 명불허전이다.

그동안 궁리와 장쯔이라는 유사한 이미지의 여배우에게 특별한 정성을 쏟아 온 장 감독의 여성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다. 거대한 스케일만큼 대규모 전투 장면의 몹신이 빈번하다. 특히 짙은 안개 속에서 벌어지는 전투 신은 압권이다.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 사다리를 만들어 동료가 만리장성을 넘게끔 만드는 장면은 ‘월드 워 Z’ 제작진이 1800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었다. 일단 재미는 충만하다. IMAX 3D로 즐기는 화면을 통해 쉴 새 없이 객석으로 날아드는 칼, 활, 괴수, 폭발물의 잔해 등은 잠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사운드 역시 훌륭하다. 작전 과정을 일일이 알리는 고수들의 타악기 소리는 심장을 뛰게 만들고, 그 동작의 디테일로써 중국 문화의 위대함으로 알리고자 하는 장 감독의 애국심이 돋보인다. 부하를 살리려다 타오티에에게 희생된 전임 사령관의 장례식이 엄숙함을 주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 애국심은 서양인은 이기심 강한 개인주의자이고, 중국인은 희생 정신이 강한 이타주의자로 노골적으로 그려진 설계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윌리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스위스의 전설이 만든 신궁 윌림엄 텔에서 따왔음을 신기에 가까운 그의 궁술로 보여 준다.

겉으로 드러난 주제는 신뢰와 희생이지만 사실 그 속에는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다. 외계인도, 귀신도 아닌 타오티에란 괴물의 탄생의 배경이 바로 인간의 탐욕이었다고 설정한 게 그렇다. 세계 최강의 무기인 ‘검은 가루’를 이용해 일확천금을 벌고자 자신을 구해 준 무명수비대를 배신한 발라드의 폭사도 마찬가지.

독재를 싫어하는 장 감독의 신념은 황제를 우스꽝스럽게 설정한 데서 다시 드러난다. 그나마 ‘영웅’에선 진시황을 영웅과 독재자, 신념을 가진 지도자와 이기심에 눈먼 허세꾼의 중간 지점에서 줄타기하도록 만들었다면 이번엔 그냥 타고난 혈통 덕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리에 앉은 철부지일 따름이라며 독재자를 대놓고 비웃는다.

하지만 거기까지. ‘붉은 수수밭’과 ‘홍등’ 등에서 중국이 현대화의 과정에서 공산주의 노선을 택함으로써 지나친 전체주의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면 배치했기에 발생한 인권 유린과 예술의 억제에 반발했던 장이머우는 찾아볼 수 없다. 대규모 블록버스터로 갈아탄 뒤에도 ‘영웅’에서 보여준 대륙의 영화감독다운 정의로운 명분마저도 윤색됐다.

게다가 만리장성과 무명수비대가 지구를 구할 마지노선이라니! 소재가 고갈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로선 유럽의 신궁 전설과 아시아의 맹주로 부상한 중국에 대한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된 신비주의와의 결합은 구미가 당기긴 했을 것이다.

다만 이제 철학을 잃어버린 장 감독이 문제이다. “인간의 희생은 신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라는 대사는 서양의 정서를 아우르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긴 하지만 그나마 장 감독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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