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특별시민’(박인제 감독, 2017)은 무겁지만 매우 흥미롭다. 변종구(최민식)는 서울 문래동 공장 노동자를 거쳐 집권 여당 새자유당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낸 뒤 현재 두 번째 서울시장을 맡고 있고, 곧 있을 지자체 선거에서 3선을 겨냥 중이다. 다음 목표는 대통령이다.

그의 캠프의 본부장은 검찰 출신 2선 국회의원 심혁수(곽도원). 경쟁자는 야당의 양진주(라미란)와 무소속의 허만길. 양진주 곁에는 야무진 브레인 임민선(류혜영)이 있다. 방송국 베테랑 여기자 정제이(문소리)는 종구의 적인 듯 아군인 듯 묘한 평행선의 관계이다.

종구는 교활한 정치인이다. 본색을 감춘 채 소신이 강하고 서울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노동자 출신의 일꾼으로 꾸미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다. 56살의 그는 젊은 유권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청년 토론회를 열었다가 26살의 광고 전문가 박경(심은경)의 “가식적인 면에 실망했다.”라는 정면 공격을 받고 바로 그녀를 스카우트한다.

경은 기존의 타성에서 벗어난 획기적인 광고를 찍지만 고루한 기득권자들에게 무시당하자 딜레마에 빠져 있던 차에 종구의 캠프에 냅다 합류한다. 그녀를 면접한 혁수의 첫마디는 “선거는 똥물에서 진주 꺼내기인데 손에 똥 묻힐 각오가 됐냐?”이다. 그렇게 경은 변기 같은 정치판에 진입한다.

진주는 만만치 않은 라이벌이다. 첫 유세 때부터 일부러 가슴 일부를 노출하며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는 등 교묘한 작전으로 점점 종구의 목을 죄어 온다. 종구는 이빨을 감춘 늑대이자, 지혜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여우이다. 그렇지만 대권을 노리는 그의 사방엔 적들이 널려 있다.

먼저 새자유당 김 대표(김홍파)이다. 그는 새까만 정치 후배인 종구가 자신을 넘어 대권 주자로 나서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이제이의 병법으로 혁수를 포섭 중이다. 혁수는 어느 쪽에 투자하는 게 배당이 클지 좌고우면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리지만 일단 이번 선거만큼은 이기고 보자는 생각으로 종구에게 ‘올 인’하면서도 배수의 진은 펼쳐 두고 있는 상태.

복병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마포 상암동에서 엄청나게 큰 싱크홀이 생기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진주와 만길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종구는 거리 유세에서 시민들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종구 캠프에서 오랫동안 이미지 광고를 담당해 온 광고계의 전설 정 선생은 새파란 경의 합류가 탐탁지 않다. 그러나 그는 소리 소문 없이 성매매로 입건된 상태. ‘서로 원하는 걸 주고 받자.’라는 대학 선배 제이의 제안에 경은 정보를 얻는 조건으로 이 사건을 제이에게 귀띔한다.

기사가 나간 다음날 정 선생은 자살을 시도한다. 종구는 겉으론 화려한 정치인이지만 집안에서는 ‘왕따’이다. 쇼윈도 부부로 사는 아내는 욕구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고미술품을 구매했다 언론에 알려지자 종구에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나도 유세에 나서야 하니 얼굴만은 때리지 말라.”라고 부탁하는, 철저하게 조작된 정치인의 아내 역할에 충실한 ‘인형’일 따름이다.

무남독녀 아름은 아버지와 담을 쌓고 사는 인물이다. 뭔 사건이나 있어야 간신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종구는 외롭고, 이번 선거가 유난히 어려워 심난하다. 그럴 때 그가 찾는 곳은 허름한 식당.

노동자 시절부터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찾았던 단골집으로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술을 마신 뒤 차를 몰고 귀가하다 빗길에 사람을 치어 죽이는데. 휘황찬란한 액션도 없고, 긴장이나 공포를 유발하는 미스터리도 별로 대단하지 않다.

여배우들이 아름다운 건 맞지만 몰입하게 만드는 절정의 미모나 성적 매력을 뿜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130분 내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그건 정치 드라마라는 외피를 뒤집어썼지만 사실상 누아르 이상 가는 피비린내를 짙게 풍기는 잔인한 시퀀스들의 퍼즐 때문이다.

겉으로는 최민식이 주연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모두가 주인공이다. 특히 ‘수상한 그녀’ 이외엔 멀티 캐스팅 아니면 조연 선에 머물던 심은경이 최민식에 뒤지지 않는 아우라를 뿜어냈으며, 신은 적지만 소신은 거대한 캐릭터를 맡은 류혜영의 존재감 역시 오래 각인될 듯하다.

신 스틸러는 건달 두목 계 사장 역의 박혁권으로 짧게 등장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옥에 티는 곽도원이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 검사 조범석 역으로 최익현 역의 최민식과 대립각을 세운 그는 이번에도 비슷하다. 더구나 계 사장을 다루는 솜씨는 딱 조범석이다.

정치계의 민낯을 샅샅이 까발린 수작 중 하나로 기록될 만하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명실상부한 첫 민주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15대 대선 때 메이크업부터 넥타이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며 광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다수의 유권자가 후보의 겉만 봤지 미처 파고들지 못했던 그런 사소한 이미지 메이킹부터 여론 조작과 네거티브 선전 등의 다양한 전술과 작전이 총동원된 선거 전략의 내부를 샅샅이 훑고 지나간다. 이에 더해 후보 단일화의 속내와 TV 토론회 무대의 이면 등의 설정으로 정치의 추악한 면모, 미디어와 정치가 어떻게 손을 잡는지 등을 폭로한다.

정치인들의 뒷거래는 대중이 상상만 했던 플리바게닝(유죄 협상), 포크배럴(제 밥그릇 챙기기), 로그롤링(야합) 등의 실상을 까발린다. 종구는 절묘하게 숱한 정치인 혹은 정당의 스케이프 고트(가상의 적 설정으로 국민 불만 해소)와 크레덴다(권력 정당화)의 권모술수를 초절정의 ‘무공’으로 ‘시전’한다.

결국 ‘정치는 쇼’이다. 그러나 영국의 하드록 그룹 퀸의 노래 이후 자본주의의 표본인 할리우드는 ‘The show must go on.’이라고 주창한다. 그래서 유권자는 그나마 다수를 평안하게 해줄 수 있는 ‘광대’를 뽑는 게 최선이자 차악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영화이다.

제이는 경에게 식용으로 사육되는 개들이 개장수를 알아보는 요령이 피 냄새라고 가르친다. 경이 기자를 떠나 정치판의 이전투구에 물든 제이에게서 피비린내가 난다고 경멸하자 제이는 “너한테는 안 날 줄 아니?”라고 응수한다. 정 선생의 자살 시도는 언론의 윤리를 묻는다. 엔딩의 공허한 트럼펫 솔로는 이 영화를 오랫동안 관객들의 가슴에 짙은 여운으로 묻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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