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콜로설’(나초 비가론도 감독, 2017)은 제목에서 이미 ‘거대한’(Huge)이란 뜻으로 커다란 사이즈의 괴수와 로봇의 등장을 예고한다. 앤 해서웨이가 이 B급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작품의 주인공을 맡았다는 사실부터 관심을 끌지만 결론부터 내리자면 ‘소리는 요란하지만 내용물은 글쎄’에 가깝다.

25년 전 서울. 공원에 있는 어린 딸을 데리러 왔던 어머니는 딸이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한다. 가까운 곳에 거대한 정체불명의 괴수가 등장한 것. 현재의 뉴욕. 글로리아(앤 해서웨이)는 연인 팀(댄 스티븐스)과 동거하며 잡지사 비정규직 기자로 일하는 30대이다.

독자들에게 매번 질타를 당하는 그녀의 유일한 비전은 잘나가는 팀이고, 유일한 즐거움은 주변에 널린 무질서한 술친구들. 그날도 어김없이 주당들과 어울려 진탕 퍼마신 뒤 아침에야 귀가한다. 팀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이별을 통보하고, 글로리아는 모든 걸 잃은 채 부모가 남겨준 고향의 허름한 집으로 이사한다.

택시도 없는 한적한 거리에서 난감해하던 그녀 앞에 트럭을 몰고 가던 초등학교 동창 오스틴(제이슨 서디키스)이 나타난다. 아버지가 물려준 바를 운영하는 그는 글로리아에게 취업을 제안한다. 취직한 글로리아는 영업 종료 후에는 오스틴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또 술판을 벌인다.

그러다 순수한 청년 조엘과 자게 된다. 그들은 서울 한복판에 거대한 괴수가 나타나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다. 글로리아는 괴수가 정수리를 긁적이는 모습을 보곤 자신이 술에 취하면 괴수로 변해 그런 난동을 벌이고, 그럴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자신의 어릴 적 특별한 경험이 있는 장소인 현재의 놀이터인 것을 알게 돼 친구들에게 고백한다.

그러던 어느 날 괴수보다 약간 더 큰 로봇이 등장한다. 그의 정체는 바로 오스틴. 무고한 생명을 죽인 죄책감에 괴로운 글로리아는 놀이터에 안 가려 하지만 오스틴은 재미로, 혹은 글로리아에 대한 적개심으로 놀이터에 선다. 그러자 글로리아도 놀이터에 들어가 그를 말려 보지만 연약한 여자가 건장한 남자를 이길 순 없는 노릇.

그렇게 서울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가는데. 장르적 전통 기법과 방식 등을 무시한 채 신선한 아이디어로 풀어낸 발상은 매우 기발하고 흥미롭다. 최악의 역사적 재앙을 넘어서 인류의 말살이 될 법한 괴수 출현이 알고 보니 한 알코올 의존증 사회 부적응자의 귀여운 주정에서 발생했다는 설정, 그 미모의 여주인공이 애교를 부리면 동시에 괴수가 지구촌 반대편에서 행동한다는 내용 등은 상업 영화의 코미디의 재료로선 신선하다.

그러나 그녀의 아픔의 원인과 과정이 생략된 게 시나리오의 기본 틀이 약한 결정적인 패착이다. 게다가 오스틴이 글로리아를 혐오하거나 배척하게 된 배경 설명 역시 나약하다. 고작 미술 솜씨 하나 뒤졌다고 그토록 저주하는 건 흔한 고어 무비의 연쇄 살인마의 ‘묻지 마 범죄’보다 무차별적이다.

또 조엘을 질투하고 팀에게 강한 열등감을 느끼는 이유 역시 불분명하다. 오스틴은 글로리아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낀다거나 정신적 애정을 표현 못해 어리광을 부리는 유아적 정신 상태를 보이진 않는다. 그냥 어릴 적 그녀에게 모든 면에서 뒤졌다는 트라우마 하나로 역전된 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 그녀를 괴롭히는 사디즘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맞지만 여전히 목적 의식은 흐릿하다.

광적인 스토커나 극단적인 정신병자라고 보기엔 그럭저럭 멀쩡하다. 다만 남성의 그릇된 라이벌 의식 혹은 남존여비 사상에서 비롯된 여성 혐오증과 이를 통해 발생하는 폭력 등에 대한 경고는 웬만한 스릴러 뺨칠 만큼 생생하다. 오스틴은 처음엔 곤경에 처한 글로리아의 구세주였다.

오래 방치된 빈집을 수선하고 새 살림살이를 장만하는 것 한 여자에겐 쉽지 않다. 자신의 승용차를 이용해 새 살림살이를 운반해 주고 창고에 있던 가구 등을 거저 내준 것은 물론 고용까지 해 줌으로써 경제적 지원과 생활의 편의 제공을 최대한 쏟아부은 오스틴의 선행은 뉴욕을 떠난 귀향을 금의환향이 아닌 낙오라고 크게 상심했던 글로리아에게 새 출발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그 부푼 꿈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 악몽이 됐다. 주변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제일 위협적인 공포가 된다는 발상은 스릴러 영화의 클리셰이자 현대 범죄 수사의 교과서며 특히 여성 (성)폭력의 실상이다. 여의도, 한강, 부천 등지에서 촬영된 서울 신에 기대할 필요는 없다.

왜 하필 서울이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는, 매우 불친절한 감독의 의도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데뷔작이라고 믿을 수 없는 피터 잭슨의 B급 SF 걸작 ‘고무인간의 최후’ 수준의 기발함에서 출발해 금세 동력과 추진력이 쇠잔했지만 용두사미는 면했다는 게 그나마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건 글로리아가 오스틴을 이겨 내는 방법이다. 엄마는 모성애라는 무기로 강해지지만 여성은 인류애로 막강해진다는 메시지이다. 화려한 비주얼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기괴한 동화를 쓰는 데 있어 팀 버튼에 뒤지지 않을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대사에서 언급하지만 비가론도의 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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