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대립군’(정윤철 감독, 2017)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장 돋보이는 건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멸절의 위기에 처한 조선이 배경인데 한국 전쟁이나 최근의 상황이 엿보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18세의 어린 광해(여진구)에게 임시 조정인 분조를 맡긴다.

자신은 명나라에 가서 원군을 요청하겠다며 의주로 피란하는데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광해의 목적지는 신철 장군이 이끄는 주력 군대가 머무는 강계. 그들의 고난스러운 여정에 북방 국경 지대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맹활약을 펼친 토우(이정재)가 이끄는 대립군이 합류한다.

천민 출신으로 양반의 군역을 대신하고 겨우 목에 풀칠할 임금을 받는 그들을 세자를 호위하는 정규군이 사람으로 취급할 리 만무하다. 일본 주력군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장 큰 공로를 인정받을 요량으로 세자를 생포하기 위해 혈안이 돼 맹추격 중이다. 여기에 나라를 배신한 군인 혹은 민간인이 부역자로 나서 세자의 퇴로를 알려줌으로써 위기는 점점 더 커진다.

산속에서 야영을 하며 한숨 돌리던 일행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불화살 세례에 풍비박산이 된다. 그런데 그 화살은 왜군의 것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선조가 보낸 암살단. 그들의 추격에 목숨이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갑자기 조총 소리가 들리고 암살자들이 추풍낙엽으로 쓰러지는 틈을 타서 세자 일행은 간신히 도망을 친다.

그러나 일본군의 추격은 목전까지 오고 결국 토우의 제안에 의해 일행은 한 낡은 산성에 마지막 보루의 베이스 캠프를 치고 수많은 군사와 막강한 화력을 지닌 일본 정규군과의 사생결단을 준비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선조와 광해로 대표되는 진정한 리더십이다. 이미 역사로 널리 알려진 선조는 무능력과 무책임의 대표적 군주이다.

그는 후궁 어머니를 둔 서자 출신. 왕의 직계가 아닌 방계 핏줄로 조선에서 처음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연명할 꼼수로 분조를 맡기기 위해 세자로 책봉했지만 그런 콤플렉스 탓에 같은 처지의 광해를 영 마뜩잖게 여겼다. 광해 역시 세자 책봉 때 형인 임해군과 갈등을 빚고 중신들의 분란을 야기한 게 부담이 컸다.

결정적으로 그는 왕이 될 마음도 없었고, 그런 능력이 있다는 착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우를 비롯한 백성들에 의해 왕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광해의 참다운 지도자가 되는 성장통의 드라마이다. 다음은 토우로 대표되는 비정규직과 민초들의 이야기. 대립군은 전쟁터의 전사임이 분명하지만 말단 졸병보다 못한 신분, 즉 비정규직이다.

목숨을 담보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미천한 지위란 점은 어쩐지 산업 재해 위험도가 높은 극한 작업 환경에 노출된 노동자를 연상케 한다. 그들에게 4대 보험이나 퇴직금이나 위험 수당이 제대로 보장될 리 없다. 세자 일행은 토우의 충고를 받아들여 험악한 산길을 이용하는데 정규군은 세자를 태운 가마만큼은 금지옥엽으로 지킨다.

그러나 맨몸으로 이동하기도 힘든 깎아지른 산을 무거운 가마를 메고 움직여야 하는 대립군들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자 토우는 과감하게 가마를 계곡 밑으로 밀어 버린다. 이에 호위대장이 폭행하며 이유를 묻자 토우는 “이렇게 세자를 태운 채 가마가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고, 그걸 방지하기 위해 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혹은 인권 회복 운동이 시작된다. 광해는 “난 왕이 될 자질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현실 도피를 선택한다. 현재의 민주 공화국에서는 선거라는 치열한 전쟁을 통해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선왕이나 실권자들의 선택이 운명을 정했다. 여기서는 토우가 “아직도 왕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라며 자신이 왕(의 자격)을 만들었음을 은유한다.

목숨 바쳐 백성을 지키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이고, 그런 지도자는 백성이 만드는 것이라고. 광해는 선조가 자신을 왕위에 앉힐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천륜을 거역할 수 없기에 왕의 밀명을 받고 자객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 준 내시의 자백을 차마 들을 수 없어 처음으로 살인을 한다. 아버지의 뜻이 그렇다면 죽어 주겠다는 의미이다.

그는 자신을 왜군에게 넘기고 목숨을 부지하겠다며 목에 칼을 겨눈 토우의 부하 곡수(김무열)에게 “죽여라. 그래도 너를 원망하지 않겠다.”라고 삶의 의지를 내려놓는다. 토우의 설득에 과오를 깨우친 곡수는 다음날 피란민 행렬과 만나 서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가창을 요청받고 한 자락 뽑는데 광해가 이에 맞춰 춤사위를 보여 주자 민초들과 함께 감동한다.

산속에서 피란민 행렬을 만난 호위대장은 일행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피란민들의 귀한 식량을 강탈하라 명령하지만 세자가 이를 저지한다. 그 뒤에 마련된 이 자그마한 화합 축제의 장에서 세자는 아버지가 버린 백성에게 대신 사죄하는 의미로 신분 따윈 버리고 위무의 춤을 추는 것이다.

주제는 두 마리 용이 새겨진 세자의 깃발에 오롯이 담겨 있다. 기를 바라보는 대립군은 “왜 용이 두 마리씩이나 있냐.”라고 궁금해한다. 수놈과 암놈일 것이라 추측하지만 그게 아니라 왕과 백성이었다. 이 씨가 건국한 조선이지만 왕이 주인이 아니라 왕과 백성이 동등한 위치에서 균일한 행복을 누릴 때 진정한 나라의 틀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이다.

선조는 한국 전쟁 때 서울 시민들을 거짓말로 안심시키고는 한강 다리를 끊어 고립시킨 뒤 미리 도주한 이승만을 연상케 한다. 선조는 왜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주요 항구의 배를 모두 파괴한다. 그 탓에 곡수는 어머니를 잃어 선조와 광해에 복수심을 품고 있다.

이 작품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와 그것을 리메이크한 ‘새벽의 7인’, ‘매그니피센트7’과도 맞닿아 있는가 하면 ‘정무문’의 특정 장면도 떠오른다. “지옥도 이놈의 나라보다 낫겠다.”, “진짜 무서운 건 왜놈이 아냐.”라는 일련의 대사는 “이게 나라냐?”라던 촛불 민심의 분노와 탄식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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