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SNS

[유진모의 무비&철학]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YG엔터테인먼트나 블랙핑크 제니 입장에서는 지난 제76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가장 돋보인, 그래서 가장 많은 수혜를 입은 장본인은 제니라고 여길 듯하다. 그녀의 사진이 25억 원의 가치가 매겨질 정도로 미디어 가치 창출에서 최고라고 외신에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칸의 레드 카펫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 HBO 시리즈 ‘디 아이돌’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데뷔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블랙핑크라고 하더라도 배우가 아닌 이상 칸에 배우 자격으로 등장할 수는 없다. 에스파처럼 칸을 후원하는 명품 브랜드의 앰배서더 자격이라면 몰라도. 하여튼 제니는 이번 칸에서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디 아이돌'이 지난 5일(한국 시각) 첫 방송되자마자 논란과 더불어 한숨만 야기하고 있다. 칸에서 먼저 공개되었을 때 각 언론들이 혹평을 쏟아 낸 게 편견이 아니었음을 국내 언론들과 누리꾼들이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칸에서 먼저 1, 2회가 공개된 후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평론가 평점) 26%, 팝콘 지수(관객 평점) 63%를 받는 데 그쳤다. 최대의 영화·드라마 평점 사이트 IMDb에서 10점 만점에 5점을 받았다. 별로 대단할 게 없는 작품이라는 의미이다.

미국 주간지 타임은 “이 드라마는 팝 스타에 대한 착취를 폭로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 착취를 즐기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롤링스톤은 “당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하고 심각하다.”라고 혹평했다. 더 플레이리스트는 “조잡하고 징그럽고 성차별적인 드라마.”라고, 버라이어티는 “여성을 묘사하는 데 혁명적인 무언가가 있는 척하지만 결국 음탕한 남성 판타지에 불과하다.”라고 각각 가차없이 비판했다.

국내 언론과 대중의 평가 역시 일방적으로 부정적이다. 쓸데없이 자극적이고, 이유 없이 성적 수위만 높을 뿐이며, 제니의 존재감도 전혀 없다는 관점이다. 제니가 도대체 왜 이런 작품에, 그런 배역에 굳이 출연했는지 납득이 안 간다는 반응이다.

이 드라마는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팝 가수 조셀린(릴리 로즈 뎁)이 사이비 제작자(위켄드)를 만나며 벌어지는 일을 통해 아이돌 스타와 대중문화 산업의 복잡한 관계를 그린다. 제니는 조셀린의 친구인 백업 댄서 다이안 역을 맡았다.

1회에서 제니는 약 10분 정도 등장했다. 뮤직비디오 촬영 장면에서 탱크톱에 핫팬츠를 입고 남성 댄서들과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춤을 추었다. 안무는 물론 표정까지 남녀의 성관계를 연상시키는 그 댄싱 시퀀스는 따로 편집돼 SNS를 통해 전 세계에 빠르게 퍼지며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HBO 유튜브 채널에 공개된 메이킹 영상에서 제니는 이 신에 대해 “안무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늘 하던 일이기에 자연스럽게 해냈다.”라고 술회했다. 과연 그럴까? 자연스러웠을지는 몰라도 감사할 것까지는 미지수이다.

블랙핑크의 네 멤버는 팀 혹은 솔로로서의 위상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의 주연 제의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내외 그 어떤 작품의 주연을 맡아도 어색하지 않다. 다만 블랙핑크의 위상과 활동에 손상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소한의 도움을 주는 작품이어야 당연히 선택할 것이다.

통설적으로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고 말한다. 그렇듯 '영화는 감독 놀음,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는 게 업계의 상식이다. 물론 그게 불변의 법칙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들어맞는다. 봉준호, 박찬욱이라면 무조건 '먹고 들어간다.'라는 신뢰감이 있다. 드라마는 김은숙, 김은희, 박지은 작가라면 일단 믿음이 간다.

'디 아이돌' 갈무리.
'디 아이돌' 갈무리.

가수에게 신곡이 중요하듯 배우에게 새 작품의 선택은 다음, 그 다음 작품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송강호가 맡은 북한군 오경필 중사 역의 캐스팅 1순위는 최민식이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전작 '쉬리'(강제규 감독)에서 북한군 특수 요원 역을 맡았는데 또 북한군 역으로 등장할 경우 이미지가 고착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제작사나 투자사가 배우 캐스팅에 애를 먹는 이유는 정상급 스타들이 작품과 캐릭터 선정에 매우 민감하다는 데 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작품 선택을 잘못할 경우 평생 배우 인생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이든, 드라마이든 캐스팅 제안이 오면 배우, 매니저, 소속사, 담당자 등은 대부분 시나리오-감독-배역-제작사-투자사(배급사, 방송사)-상대 배우의 순서로 작품을 검토한다. 조연 혹은 그 밑의 경우야 찬밥, 더운밥 가릴 게 없겠지만 주조연 이상의 레벨은 다르다.

더구나 제니는 배우 데뷔작이었다. 도대체 그 작품을 데뷔작으로 고른 이유가 오리무중이다. 샘 레빈슨 감독은 배우로 출발해 각본가를 거쳐 영화감독이 되었고, 얼마전 '유포리아'로 드라마 감독상을 수상한,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작가이다.

하지만 그의 전작들은 개성은 강하되 인상적이지 않았고, 완성도 역시 뒤떨어지 않았지만 상업적으로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즉 '디 아이돌'이 IMDb에서 받은 5점 정도의 감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를 철저하게 검토했어야 마땅했다.

제니 정도 되는 월드 스타라면 돈이 아쉬울 리 없고, 배우 욕심에 눈이 멀 필요도 없다. 게다가 요즘은 모든 배우들이 작품의 성적인 수위, 노출 수위 등에 대해 사전에 철저하게 확인하고 확약을 받는 게 상식이다.

제니는 외모와 지명도만 놓고 본다면 할리우드 영화의 주연 배우 자리도 충분히 노릴 수 있는 위치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나 경력으로 보았을 때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는 게 옳은지 가늠하기 쉽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소속사가 있는 것이다.

YG엔터테인먼트는 현재 배우들도 소속되어 있고, 영화 투자도 하며, 각종 콘텐츠 제작도 겸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음반 제작사이다. 내로라하는 국내 정상급 엔터테인먼트 대기업이기는 하지만 이번 제니의 '디 아이돌' 출연 결정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혜안이 완벽하지 못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디 아이돌'이 공개되기 전까지 제니는 가수였다. 무대 위에서 노출이 심한 의상도 입어 봤고, 선정적인 안무도 보여 줬다. 심지어 속옷 광고를 찍은 사진을 SNS에 공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의 연출은 가수로서의 퍼포먼스이고, SNS는 팬에 대한 서비스이자 소통이다.

'디 아이돌'은 다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의 노출과 섹스 어필은 당위성과 예술성이 담보되어야만 보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고 배우의 품격을 깎지 않는다. 그래야만 관객이 성적 판타지를 느낄지언정 그와 동시에 작품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기생충'에 동익(이선균)과 연교(조여정)의 부부 관계 장면이 나온다. 이 작품의 흐름상 없어도 되는 시퀀스이지만 그 누구도 이 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와 재미를 도와주었다는 반응이다. 동익의 집에 숨어 든 기택(송강호) 가족의 긴장도를 더해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은 주연 배우가 실제 성관계를 했으며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영화 역사상 두고두고 회자될 작품이지만 포르노라는 비난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전후 일본의 무기력함과 욕망의 불협화음을 노래한 걸작이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