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컬처] 퀸에 브라이언 메이도 있었다 [유진모 칼럼] '보헤미안 랩소디'
[히스토리&컬처] 퀸에 브라이언 메이도 있었다 [유진모 칼럼] '보헤미안 랩소디'

[미디어파인=유진모 칼럼니스트] 7월 19일. 1947년 영국 록 그룹 퀸 기타리스트 겸 천체물리학자 브라이언 메이, 1955년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1974년 배우 홍승일, 1976년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배우 안연홍, 1984년 개그맨 미키광수, 1992년 브브걸 은지, 1995년 배우 박한솔, 1996년 에이핑크 오하영, 싱어 송 라이터 유후, 1999년 아이오아이 김소혜 등이 태어났다.

1374(1304~) 이탈리아 시인, 정치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1965(1875~)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이승만 등이 눈을 감았다. 1870년 프랑스 제2제국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 왕국에 선전포고하면서 보불 전쟁이 발발하였다.

브라이언 메이는 7살 때부터 기타를 만지기 시작했는데 에릭 클랩튼과 지미 페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대학 때 로저 테일러(드럼), 팀 스태펄(보컬, 베이스)과 함께 밴드 스마일을 결성했다. 팀이 탈퇴하자 프레디 머큐리(보컬)와 존 디콘(베이스)을 영입해 퀸을 출범시켰다.

이후 퀸의 활약상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브라이언 싱어 감독, 2018)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멤버 중 테일러가 제일 잘생겼고, 머큐리가 당대 최고의 보컬리스트이자 퀸의 음악을 전체적으로 책임졌기에 메이는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가 불세출의 기타리스트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2005년 영국 라디오 방송국 플래닛 락이 실시한 '역대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투표에서 7위에 선정되는가 하면 매거진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에서 26위에 올랐으니 그가 어느 정도 위대한 기타리스트인지 알 수 있다.

그가 젊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손수 제작한 일렉트릭 기타 '레드 스페셜'이 시그니처이다. 그는 이른바 3대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에릭 클랩튼, 제프 벡, 지미 페이지(레드 제플린)를 비롯해 에디 밴 헤일런(밴 헤일런), 조지 해리슨(비틀스), 데이비드 길모어(핑크 플로이드), 키스 리처즈(롤링 스톤스), 피트 타운젠드(더 후) 등 록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들과 동시대에 활동했다.

퀸의 히트 곡 중 'We will rock you'를 작곡했다. 속주를 즐기지는 않지만 치밀하게 구성한 솔로 파트 애드 리브로 유명하다. 3집 'Sheer heart attack'의 첫 번째 트랙 'Brighton rock'에서 그는 딜레이 이펙터로써 자신이 연주한 멜로디가 몇 초 후에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면 여기에 화음을 맞추는 연주법으로 유명하다.

27살에 요절한 지미 헨드릭스가 스피커 앞에서 연주함으로써 되돌아나오는 음에 맞춰 연주한 피드백 주법을 개발한 것과 비교되고는 한다. 또한 그는 피크가 아닌 동전으로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보여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실 그는 마른 체형이었다고 한다. 곱슬머리에 박시한 옷을 입었던 게 그런 콤플렉스를 감추려고 했던 것.

구로사와 기요시는 기타노 다케시와 함께 일본 영화의 희망이라고 추앙받는 수준의 감독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오즈 야스지로, 로버트 올드리치, 토브 후퍼, 존 카펜터, 장 뤽 고다르, 테오 앙겔로풀로스 등의 영향을 받았다.

'큐어', '절규', '회로', '토쿄 소나타' 등이 그의 걸작으로 많은 영화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한 호러 등에 강세를 보였다.

최근 이승만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개봉된다고도 하고, 여기저기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물론 미국에 파견돼 우리의 주권 회복을 위한 청원 외교를 전개했도, 독립운동을 했으며, 광복 이후 미국과 소련의 신탁 통치를 반대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주도한 점은 인정할 만하다.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농지 개혁, 초등학교 의무 교육 등 교육 선진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평화선 선포 등의 족적을 남긴 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있다.

하지만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반칙으로 연임을 하고 독재 권력을 추구하다 결국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저지름으로써 4·19 혁명을 야기해 하야한 결과는 그가 초심을 잃고 권력만 추구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결정적으로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직전 자신은 심복들과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치면서 서울시민들에게 서울을 사수하겠노라고 방송했다는 다수의 '증언'은 할 말을 잊게 만든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정치 깡패를 키우고, 힘으로 개헌을 밀어붙여 장기 집권하려 했던 사실만 보더라도 그는 우상화되어서는 안 된다. 박정희, 전두환이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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