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에서 7시까지의 주희', 감정 강요하지 않는 자유의 에세이 [유진모 칼럼]
'5시에서 7시까지의 주희', 감정 강요하지 않는 자유의 에세이 [유진모 칼럼]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5시에서 7시까지의 주희'는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이 싫어서'로 주목 받은 장건재 감독의 5번째 장편 영화이다. 프랑스 작가 아녜스 바르다의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를 좋아해 제목까지 유사하게 정하며 오마주했다. 주희(김주령)의 오후 5시부터 7시까지의 2시간을 통해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삶에서 진화할 수 있는지 잔잔하게 그린다.

40대 중반의 주희는 연극배우 시절 호진(문호진)을 만나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딸 하영을 낳았지만 관계가 악화되어 이별을 준비 중이다. 생계를 위해 배우를 그만두고 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호준은 대학로 한 극단에서 연출을 맡고 있는데 작품 속에 자신과 주희의 이야기를 녹여 제 변병을 늘어놓으려 한다.

주희는 5시에 병원에 가서 유방 검사를 받는다. 의사는 가능성은 낮지만 암일수도 있으니 정밀 검사를 받자고 하면서도 '별일 아닐 것이다.'라며 안심 시킨다. 학교로 돌아온 주희는 동료 교수부터 학생들까지 자양한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내면의 소용돌이를 추스린다. 그 와중에 하영을 돌봐 주던 어머니와 하영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맞는다.

'5시에서 7시까지의 주희', 감정 강요하지 않는 자유의 에세이 [유진모 칼럼]
'5시에서 7시까지의 주희', 감정 강요하지 않는 자유의 에세이 [유진모 칼럼]

호진은 술에 취하면 배우들에게 심한 말을 하다 못해 맨정신에도 연기력으로 다그친다. 선배가 충고를 하지만 그의 폭거는 잦아들 줄 모른다. 주희는 엄마에게 큰이모의 죽음의 원인을 묻고 유방암이라는 답을 듣는다. 외할머니 역시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두려운 마음과 '나는 아니겠지.'라는 주입식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 내려 노력한다.

주희와 호진이 왜 사이가 벌어졌는지,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그것은 관객들의 사고와 사유를 유도하기 위함이다. 사람 사는 게 '거기에서 거기'이다. 디테일의 차이는 있지만 별반 바를 바 없다. 두 사람 중 누가 외도를 했다거나, 경제적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암시는 없다. 그렇다면 사고의 깊이는 더욱 깊어진다.

40대 이상의 나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질풍노도 같은 20대와 30대 초중반에는 걱정이 뇌리에 파고들 시간이 없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쁘고 제법 희망도 있다. 최소한 절망은 없다. 죽음에 대한 염려도 전혀 없다. 이때의 가장 큰 가치관은 사랑 혹은 돈이나 출세이다. 연극을 하는 두 사람은 당연히 낭만적인 사랑이었을 것이다.

'5시에서 7시까지의 주희', 감정 강요하지 않는 자유의 에세이 [유진모 칼럼]
'5시에서 7시까지의 주희', 감정 강요하지 않는 자유의 에세이 [유진모 칼럼]

그래서 결혼했다. 하지만 연출가이든, 배우이든 연극이라는 예술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풍요롭지 못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이제 40대 중반.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현상 유지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처지. 지금의 자리라도 빼앗기지 말고 지켜야 하는 신세인 것이다. 미래를 설계한다기보다는 노후 걱정이나 해야 하는 입장.

영화는 수시로 '자유를 얻어야 죽음을 이길 수 있다.'라는 대사를 남발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유에 대한 갈망을 연계하고 있다. 그런데 내용은 오히려 자유보다는 실존주의쪽에 가깝게 웅변한다. 실존에 의한 죽음에 대한 공포 극복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실존은 자기의 존재를 자각적으로 물으면서 존재하는 주체이다.

실존주의는 특히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장 폴 사르트르는 그 실존주의 중에서도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였다. 주희가 그렇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 받았다.'라고 말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문제가 아니라 주희라는 본질에 앞선 실존(주체)으로써 자유를 선언함으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멀어진다.

'5시에서 7시까지의 주희', 감정 강요하지 않는 자유의 에세이 [유진모 칼럼]
'5시에서 7시까지의 주희', 감정 강요하지 않는 자유의 에세이 [유진모 칼럼]

즉 하이데거의 '으스스함'(불안)을 극복하는 것이다. 주희는 종교에 기댄다거나, 타인의 위로에 의지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엄마와 포옹하며 '엄마, 나 너무 무서워.'라고 하소연할 따름이다. 사르트르는 또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외쳤다. 모든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기 마련인데 인간 사회에서는 타인이 꼭 있어야만 하고, 타인은 나를 감시하기 마련이다.

그 감시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래서 타인이 지옥인 것이다. 주희가 자기에게 불평하는 동료 교수와 함께 '파이팅!'을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줄곧 모노톤으로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컬러로 액자 구조가 도입된 게 포인트. 억지나 강요가 없는 연출 기법이 매우 친근하게 다가온다. 일부 배우들의 연기가 완벽하지 않아 오히려 현사실적이다. 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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