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말로', 중용의 미덕의 상쾌한 누아르 [유진모 칼럼]
'탐정 말로', 중용의 미덕의 상쾌한 누아르 [유진모 칼럼]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1993년 영화 '크라잉 게임'(닐 조던 감독)이 개봉되었을 때 수많은 관객들이 충격을 받았다. 호평과 혹평이 난무했던 이 작품은 결국 걸작으로 기록된다. 겉으로는 IRA 문제를 다룬 듯했으나 깊은 내면은 사회적 금기를 건드리면서 사랑과 포용을 웅변했다. 그 중심에는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 제이 데이비슨의 맹활약이 있었다. 이 작품은 결국 '순수한' 사랑을 외쳤다.

그 조던 감독이 맨부커상 수상 작가 존 밴빌의 '블랙 아이드 블론드'를 원작으로 한 누아르 '탐정 말로'(21일 개봉)로 돌아온다. 그러나 미리 머리를 지끈거릴 필요는 없다. 이 작품은 감독이 어깨의 힘을 빼고 재미에 충실하는 한편 할리우드의 추악한 내면을 자아비판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누워서 침 뱉기'로 관객들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주겠다는 듯하다.

1939년 로스앤젤레스, 경찰 출신 사설 탐정 필립 말로(리암 니슨)는 매력적인 상속녀 클레어(다이앤 크루그)로부터 퍼시픽 필름 스튜디오의 소품 담당이었던 그녀의 정부 니코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니코는 공식적으로는 코바타 클럽 앞에서 술에 취해 차에 치여 죽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멕시코에서 그를 발견한 적이 있다며 죽음이 날조되었음을 주장한다.

말로는 클레어의 어머니인 영화배우 도로시(제시카 랭)의 고용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 도로시와 클레어 사이에는 묘한 질투와 경쟁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말로는 니코의 여동생 린을 만나지만 갑자기 나타난 멕시코 건달 2명의 습격에 정신을 잃는다. 다음날 린은 처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다. 말로는 코바타 클럽 주인 플로이드를 만나지만 정보를 얻지 못한다.

'탐정 말로', 중용의 미덕의 상쾌한 누아르 [유진모 칼럼]
'탐정 말로', 중용의 미덕의 상쾌한 누아르 [유진모 칼럼]

말로는 마약왕 루의 심복 세드릭에 의해 그의 앞에 불려 간다. 루는 니코가 자신의 마약 운반책이었는데 그가 마약을 중간에 빼돌렸고, 그의 죽음을 위장하는 데 코바타 클럽이 앞장섰다고 주장한다. 말로는 코바타에 갔다가 엄청난 진실을 목도하고 세드릭을 구해 준다. 집에 돌아온 그 앞에 니코가 나타난다. 니코는 클레어에게 만나자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우선 머지않아 72살이 되는 니슨의 잠깐의 액션이 어색하다는 것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곧 71살이 되는 랭에게서 그 어떤 매력을 찾는 것도 금물이다. 두 가지만 전제한다면 깔끔한 누아르식 탐정 영화 한 편을 즐길 수 있다. 어느 정도 가능한 클리셰이기는 하지만 작가(감독)와의 두뇌 게임을 펼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내부 폭로 컨셉트가 통쾌하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대사에도 등장하는 '언약의 궤', '몰타의 매', 그리고 크리스토퍼 말로에 있다. '몰타의 매'는 그야말로 누아르 탐정 영화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 '형사 말로'가 도착하고자 하는 탄착점인데 그 결과는 관객들이 판단할 몫이다. '언약의 궤'는 십계명을 담은 케이스를 말한다. 즉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질서와 정의이다.

말로는 경찰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연금도 못 받는 처지가 되어 실직한 뒤 사설 탐정으로 일하고 있다. 즉 그는 기존의 질서와 틀에 어울리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그는 항상 사건의 중심에 서 있지만 그의 동료였던 현직 경찰들은 항상 뒷북만 치고 다닌다. 법과 형식을 외치는 원칙주의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외치려는 의도.

'탐정 말로', 중용의 미덕의 상쾌한 누아르 [유진모 칼럼]
'탐정 말로', 중용의 미덕의 상쾌한 누아르 [유진모 칼럼]

십계명은 그야말로 간단하다. 두터운 법전과는 다르다. 물론 지금은 세상이 복잡해져서 이 법전도 보강해야 할 상황이지만 중요한 것은 기본이다. 살인, 절도, 간음, 거짓말 등을 금지하고 서로 존중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기초 질서가 먼저 확립되어야 한다. 말로는 더 많은 보수를 제안하는 도로시의 의뢰를 거절하고, 클레어에 대한 정보를 절대 넘기지 않는다.

비록 그는 공식적인 법의 집행자인 경찰과는 다른 '업자'의 신분이지만 원칙과 도리는 지킨다. '어둠의 자식'일지라도 자기만의 법률은 있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말로는 16세기 영국에서 활약한 유명한 작가이다. 그는 기존의 사회적 통념과 종교적 질서 등에 반발하는 전복과 위반의 키워드였다. 그의 작품 속에는 자아, 자유, 도전, 좌절, 회의 등이 넘실댔다.

전술한 이 세 가지 키워드는 결국 메데이아로 귀결된다. 그리스 신화의 젊고 아름다운 마녀인 메데이아는 아르고호 원정대를 이끌고 온 이올코스의 왕자 이아손에게 반해 아버지인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를 배신하고 이아손을 도와 황금 양털을 가질 수 있게끔 도와준 인물이다. 그러나 이아손은 그녀를 배신하고 코린토스 크레온 왕의 딸 글라우케와 결혼하려 한다.

​'탐정 말로', 중용의 미덕의 상쾌한 누아르 [유진모 칼럼]​
​'탐정 말로', 중용의 미덕의 상쾌한 누아르 [유진모 칼럼]​

이에 메데이아는 크레온과 글라우케를 독살하고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을 죽임으로써 이아손에게 잔인하게 복수한다. 이렇듯 그녀는 배신과 복수의 대명사이다. 자신이 아버지를 배신했으나 그 배신의 원인 제공자인 남편에게 배신 당하자 극단의 방법으로 대응한다. 배신과 복수의 끝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말로는 끝까지 의뢰인에게 도리를 지킨다.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은 법일까, 정의일까, 의리일까, 이익일까? 퍼시픽은 매춘, 마약 등의 사업으로 뒷돈을 챙겼다. 주연 배우들은 항상 사고를 치고 마약을 달고 산다고 폭로한다. 그래서 영화사에는 보안 책임자가 필요하다. 영화는 관객들을 속이고, 눈 멀게 만들어서 막대한 이득을 챙긴다? 도로시는 메데이아를 "우리 모두 언젠가는 해야 할 역할이다."라고 외친다.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하지만 왠지 습기 가득한 런던 뒷골목이 연상되는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결국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다. 제도권에 속하지도, 그렇다고 뒷골목에 속하지도 못하는 말로는 '적당한' 중용의 아이콘이다. 적당히 법을 지키거나 어기면서 적당히 타협하고, 협업하되 중도를 지키자는 테제가 노골적이다.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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