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는 안나 가발다의 동명의 단편집의 작품들을 배우 겸 감독 아르노 비야르가 각색하고 연출한 영화다. 4남매의 첫째 장피에르는 아버지 사후 엄마와 세 동생들을 돌보며 아버지 노릇을 해온 성공한 와인 사업가다. 나탈리와의 사이에 초등생 딸 샤를롯을 뒀다.

남편과 데면데면 지내던 문학 교사 둘째 쥘리엣은 40살의 나이에 임신하고, 가족들은 진심으로 축하해 준다. 하지만 5개월째에 태아가 죽었다는 판정을 받고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 이혼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작가를 향한 열정을 멈추지 않고서 계속 글을 쓰고, 장피에르는 아낌없이 칭찬한다.

소심한 성격의 샐러리맨 셋째 마티유는 사내의 사라를 짝사랑하지만 계속 망설이고만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나타나 최근 이사하지 않았느냐며 단둘이 집들이를 하자고 제안하고, 그렇게 둘은 연인이 된다. 사진작가를 꿈꾸는 막내 마고는 그러나 녹록지 못한 현실의 벽에 번번이 부딪친다.

엄마의 제안으로 부르고뉴의 엄마 집에 4남매가 모여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다. 그런데 장피에르는 제가 주선해 준 회사 브로슈어 사진 일을 마고가 뿌리친 것을 뒤늦게 알고 화를 내며 꿔준 1만 유로나 갚으라고 소리친다. 마고는 “아빠인 줄 아냐”고 대들고 그렇게 파티는 엉망진창이 돼버린다.

나탈리가 마고에게 큰돈을 꿔준 데 대해 바가지를 긁자 장피에르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문다. 그에게 혼전에 사귀었던 헬레나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그녀는 백혈병에 걸려 오래 못 산다며 보고 싶다고 말한다. 헬레나를 다시 만난 장피에르는 굳게 무장했던 마음이 옛 추억 때문에 흔들리는데.

외형적으론 원작에 충실한 듯하지만 안톤 체호프의 소설 ‘갈매기’도 살짝 엿보인다. 유명 여배우의 아들인 작가 지망생 뜨레쁠레프와 배우를 꿈꾸는 부잣집 딸 니나는 사랑했지만 서로의 어긋난 선택 때문에 결국 뜨레쁠레프의 자살이란 비극으로 끝난다. 장피에르와 헬레나는 이 연극 주역으로 만났다.

장피에르는 배우를 꿈꿨지만 헬레나와 달리 자신의 천직이란 확신이 없었다. 또 헬레나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임신하자 낙태를 권유한 뒤 그녀를 떠났다. 그 후 그냥 관습적으로 결혼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영업을 했지만 삶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 강한 척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평탄한 듯해도 저마다의 크기로 혼돈을 겪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어차피 삶은 살고, 또 살아져야 하기에 혼란스러움을 애써 잊고 저마다의 방법론으로 생활을 영위해간다. 인생의 의미를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지, 또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주제는 ‘갈매기’와 흡사하다.

장피에르는 결국 자신의 선택이 틀렸고 지금까지 헛살았음을 깨달아 마지막으로 헬레나에게 전화를 건다. 안 받는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직도 헬레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토로한 뒤 호텔 창에서 뛰어내린다. ‘난 꿈과 이미지가 뒤섞인 혼란 속을 떠다니고 있어’라고 헬레나에게 뇌까리면서.

마티유를 제외한 세 남매에겐 저마다의 예술성이 있었다. 그런데 장피에르는 아버지 없는 집안의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이 더 컸기에 자신의 배우로서의 미래에 대해 자신감도 도전 정신도 부족했다. 환경이 그에게 던진 선택지는 불행하게도 단 하나였다. 슬퍼도 못 울고, 아파도 내색할 수 없었다.

마티유는 가족 사이에서 떠도는 섬이었다. 엄마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어쩔 수 없이 낳은 마티유보다 든든한 장남과 자기주장이 강한 두 딸에게 더 애착을 가졌다. 사라를 데리고 엄마 집을 찾은 마티유는 형의 방에서 록 음악을 틀어놓고 광적인 몸짓을 한다. 가족과의, 또 자기와의 화해의 용틀임!

지나치게 평범한 자신 혹은 이웃의 삶을 들여다보는 듯한 자아성찰과 관음증의 재미와 감동이 썩 좋다. 장피에르의 회사는 ‘자신감, 통찰력, 카리스마, 용기, 기회’를 강조한다. 정글 같은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 키워드다. 하지만 실제 그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은 많지 않고 갖추기도 어렵다.

그래서 헬레나는 한때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이라고 생각해 본 적 있다”고 술회한다. ‘이런저런 방향으로 살아라’라고 충고한다든가, 주인공들의 결말이 해피 엔딩이라고 작위적이고 상업적인 끝맺음을 만든다든가 하지 않고 덤덤하게 현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게 가슴에 와닿는다. 갈매기나 사람이나.

이진관이 1984년 발표한 ‘인생은 미완성’(김지평 작사)이란 노래가 있다. 마치 그 가사를 영화한 듯하다. 성 보나벤투라와 미국을 대표하는 자아초월심리학의 대가 켄 윌버가 강력하게 연상된다. 보나벤투라는 최상위의 윤리의식이자 양심의 불꽃이라 불리는 신데레시스를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봤다.

“이성은 분명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빛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진리를 알 수 없기에 명상과 기도로써 영혼을 끊임없이 단련해 하느님과 직접 일치할 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서 중립주의, 중용주의 편에 섰다. 윌버의 수행과 명상으로 보는 ‘관조의 눈’이다.

그는 사람은 감각과 과학으로 인지하는 ‘감각의 눈’, 이성과 논리로 인식하는 ‘이성의 눈’, ‘관조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했다. 마지막이 최상위인 건 당연하다. 직장에서 상사가 잔소리를 하자 관두겠다던 마고는 상사의 ‘생활비’라는 한마디에 다시 일을 한다. 때론 현실과의 타협도 관조다. 상영 중.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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