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봉에서 바라 본 코뿔소 바위와 삼각산

[미디어파인 칼럼=최철호의 한양도성 옛길] 삼각산 아래 삼봉재를 찾아 길을 나선다. 비 그친 후 나무에 연꽃이 피어나듯 화창한 하늘이다. 구름 한 점 없이 삼각산 봉우리가 이어져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 하나둘씩 꽃봉오리가 터지는 봄날이다. 하늘이 네 철을 나눠 놓으니 추위가 가고 꽃이 터지니 다 때가 있는 듯하다. 바람은 차갑지만 삼각산을 오르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백악산 너머 병풍처럼 펼쳐진 봉우리들이 눈앞에 선명하다. 족두리봉에서 향로봉을 지나 비봉 위 순수비가 햇빛에 반짝거린다. 비봉 가는 길에 삼봉재가 있을까. 지나가는 등산객에게 물어보니 얕은 미소만 짓는다.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삼각산 삼봉재는 어디에 있었을까

▲ 삼각산 비봉 가는 길_바위와 하늘 그리고 나

무작정 푯말을 보고 비봉에 다다르니 높고 넓은 바위들만 무성하다. 올라야 보일까. 순수비가 보일 듯 말 듯 궁금하다. 한숨을 내쉬고 먼 산을 쳐다본다. 1시간을 걸어 여기까지 왔는데 비봉을 못 보니 안타까운 심정이다. 올라 가보자. 나무도 없고 의지할 줄도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바로 이런 느낌일까. 풀린 다리에 힘을 주고 힘껏 오른다. 200여 년 전 추사 김정희는 어떻게 올랐을까. 31살 젊은 나이에 힘찬 기백을 보이며 쉼없이 올라갔을 것이다. 친구와 함께 무학대사의 비를 꼭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삼봉 정도전도 비봉에 올랐을까. 가파르고 위험하다. 추사 김정희의 궁금증이 비문을 읽게 하였다.

▲ 비봉 오르는 길_추사와 나를 만나는 시간여행

비봉 오르는 길은 위험천만하다. 금석학의 대가로 우뚝 설 수 있는 추사도 32살 나이에 또다시 친구와 오른다. 68자의 비문을 판독한 후 진흥왕순수비로 단정한다. 삼봉 정도전의 삼봉재를 찾아 쉬어 갔을까. 사모바위과 만경대 사이로 구름이 잠시 머문다. 길을 재촉하여 정릉곡이 있는 산봉우리로 이동한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로 내려오니 북악터널 위다. 터널은 한양도성과 탕춘대성을 넘어 정릉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 옛날 터널이 없었던 시절 산을 넘으면 계곡 아래 사찰이 많았다고 한다. 삼각산 아래 정릉계곡 가는 길 양지바른 곳에 바위가 우뚝 서 있다. 자세히 다가가 보니 바위에 글씨가 새겨 있다. 삼각산 남신지위,삼각산 여신지위 선명한 글씨체다. 이곳이 삼봉정사(三峰精舍) 산신각이다.

삼봉정사가 삼각산 정릉곡에 있었다

▲ 평택 진위에 있는 삼봉기념관

작은 암자인 삼봉정사가 바위 아래에 있고, 석탑에 쓰여진 한자를 보니 삼봉사라 적혀있다. 그럼 이곳이 삼봉재가 있었던 곳일까. 풍경소리와 종소리를 따라 암자를 둘러보니 삼봉에 얽힌 이야기가 범종에도 적혀있다. 삼봉 정도전의 호는 바로 삼각산의 삼봉에서 유래되었다는 증거다. 삼각산은 서울의 진산이다. 주맥이 응봉을 이루어 경복궁에 닿았다. 좌맥은 도봉산을 이루어 남한산성을 배후로 하였으며, 우맥은 인왕산으로 북한산성을 뒤로하니 명산 중 삼각산이 삼봉이다. 삼각산은 뿔 같은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 백운대, 만경대 그리고 인수봉을 말한다. 서울을 상징하는 산이다. 동서남북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 한양의 진산이고 600여 년 전 도읍지를 정할 때 오르내렸던 영산이자 명산이다. 바로 삼각산의 뿔 같은 세 봉우리가 정도전의 삼봉(三峰)이니 삼봉정사가 더욱 궁금하다.

▲ 삼각산 바위 틈에 핀 참꽃 진달래

삼봉의 얼굴을 본적이 있는가? 삼봉의 영정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고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권근이 남긴 글에 ‘온후한 빛과 엄중한 용모는 높은 산을 우러러 보는 듯, 다가서면 봄바람 속에 앉은 듯하다’고 그렸다. 오늘 같은 날씨인가. 낮과 밤이 같아지는 춘분이 지나니, 삼각산에 참꽃 진달래가 피고 꽃 향이 봄바람에 산들거린다. ‘빛은 만 길이나 솟아오르고, 기는 무지개를 뱉어 놓은 듯, 뜻이 꺽이지 않고, 마음이 넓고 덕이 넘쳐난다.’ 보고 싶은 얼굴이다. 자기관리가 철저한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다. 자기수양이 철저한 사람의 영정은 어디에 있을까?

삼봉 정도전을 만나러 문헌사 가는 길

▲ 평택 진위에 있는 문헌사_삼봉 정도전의 사당

삼봉 정도전은 삼각산 아래 정릉곡 가기전 삼봉재라는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밭농사와 약초를 가꾸며 제자를 가르친 글 읽는 선비이자 농부였다. 김포와 부평 다시 김포를 오가며 5년 동안 세 번이나 집을 옮겨야 했던 삼봉을 찾아 평택 진위에 있는 문헌사로 공간이동을 한다. 삼각산 아래 정릉동에서 무봉산을 지나 진위천 시작점인 진위 은산마을까지는 80여 km이다. 예전에는 한강을 건너가야 하는 길이 자동차로 1시간 20분이면 도착한다. 용인과 평택의 경계다. 봉황이 춤을 추는 듯한 산,무봉산에 삼봉 정도전이 중년에 머물렀던 곳이다. 남양부사로 지역을 다스렸던 곳이 삼봉 사후 467년만에 고종때 받은 사액 현판이 문헌사(文憲祠)다.

삼봉 정도전은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가요 정치가다. 이론만 밝은 경제학자가 아니라 지역을 다니고 현장을 아는 실천가다. 곧 지행합일의 선비요, 현명하고 지혜로운 조정가이자 자기수양이 철저한 사람이다. 삼봉은 인왕산과 백악산을 직접 답사하고, 목멱산과 낙타산을 오르며 한양도성을 설계하였다. 성곽을 쌓고 성문을 만들어 4대문과 4소문에 이름까지 짓는다. 종묘와 사직단을 만들고 비로소 경복궁 낙성식을 한다. 새로운 수도 한양의 설계자다. 미래 500년을 꿈꾼 이상주의자로 한성부 5부 52방에 뜻을 찾고, 동네방네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였다. 나라가 살고 도읍지가 살아 숨 쉬었다. 그는 ‘유학에서도 으뜸이요, 공적에서도 으뜸이다’라며 태조 이성계가 친필로 쓴 네 글자와 거북 등껍질로 만든 가죽옷, 귀갑구(龜甲裘)를 선물한다.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누구인가

▲ 무봉산 자락 문헌사에 핀 하얀 매화

600여 년 전 유종공종(儒宗功宗)으로 불리던 그는 57세에 생을 마감 당했다. 민본에 대한 생각의 차이로, 대학자이자 정치가는 정적인 태종 이방원에 의해 스러졌다. 하지만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한양의 설계자이며 민본주의자인 삼봉 정도전은 467년 만에 신원이 회복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는 고종에 의해 문헌(文憲)이라는 시호와 함께 유종공종이라는 편액을 받는다. 그리하여 안성과 평택의 경계인 진위에 사당이 지어지고, 삼봉집 목판이 전시되어 삼봉기념관이 되었다. 넓지 않은 대지, 높지 않은 매화나무에 핀 하얀 매화에 벌들이 날아와 앉는다. 삼봉 정도전의 영정에 비친 온화한 눈빛이 매섭지만 쓸쓸해 보이는 이유는 차가운 봄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경기도 가장 남단,
바다와 산과 들이 있는 미래도시 평택,
역사를 품고 문화를 담아 봄날 시간여행 해 볼까요.

▲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저서)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최철호 소장]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 전문가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지리산관광아카데미 지도교수
남서울예술실용전문학교 외래교수

저서 :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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