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권제의 생활어원 및 상식] 이슬람(al-islām)/ 이슬람교 또는 회교(回敎)는 하느님(알라)을 믿고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보며 불교,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와 함께 세계 5대 종교의 하나이다. ‘이슬람’은 아랍어로 복종, 순종을 의미하고 이슬람 신자는 남자는 무슬림, 여자는 무슬리마라 한다. 이슬람에서는 독신보다 결혼이 정상이고 가족을 사회의 기본 단위로 생각한다. 꾸란은 수도원의 독신생활을 혹평하나 신비주의자들은 여자를 악으로 보고 독신생활을 한다.

가장 성스러운 곳은 메카 카바이고 그 다음은 메디나의 예언자 성전, 3번째는 무함마드가 승천한 예루살렘이다. 시아파에게는 이라크 카르발라와 이란 메셰드도 성지이다. 신비주의자 수피 성인들을 따르는데 그들의 무덤도 성지가 된다. 이슬람력은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이주한 622년을 원년으로 삼는 태음력이다. 축제일은 라마단 달의 종말을 축하하는 단식 종료제와 순례의 종결을 기념하는 순례제가 있다. 또 무함마드가 하늘로 승천한 날과 최후의 심판일을 축일로 한다.

예외는 있지만 이슬람 국가의 국기에는 빨강, 흰색, 초록, 검정만 넣는다. 빨강은 아랍 세계를 이어주는 '혈연'을, 흰색은 '정통 칼리파 시대'를 상징한다. 초록은 사막에서의 번영과 최초 시아파 국가인 파티마 왕조의 상징으로 쓰였고, 검은색은 압바스 왕조를 상징한다.

이슬람 교리는 이만(알라, 천사들, 경전들, 예언자들, 마지막 심판, 운명론)과 이슬람의 다섯 기둥(신앙의 증언, 예배, 종교적 헌납, 단식, 순례)을 기본으로 하여 6信 5行이라 부른다. 신앙 고백은 '신의 유일성과 무함마드는 신이 보낸 이'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루 5번(해뜰 무렵, 정오, 오후 4시경, 해질 무렵, 잠자기 전) 올린다. 종교적 헌납은 코란에 명시되어 있는데 대부분 국가에서 개인의 양심에 따른다. 단식은 이슬람력 9번째 달인 라마단 한 달간, 매일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식음 및 성적 욕구를 자제한다. 그러나 해가 진 후 정상생활로 돌아온다. 이슬람교도들은 일생에 1번 이상 이슬람력 12월 7~10일에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절대자 숭배, 사후세계, 그리스도 업적과 성경을 존중하는 점 등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기독교의 원죄의식이 없고 '대속' 개념도 부정해서 개인의 죄는 스스로 신에게 회개하여 용서받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대한 예언자로 존중하나 신이 선택한 여러 예언자 중 하나며 결정적 예언자는 무함마드로 본다. 성경도 신의 말씀이 일부 있다고 동의하나 성직자들에 의해 변형되어 꾸란만이 완전한 형태의 성서로서 절대적이라고 본다.

‘꾸란/ 코란(읽다)’은 이슬람 경전으로 무함마드가 받은 첫 계시가 “읽어라! 창조주이신 너의 주님의 이름으로”라고 시작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슬람에서는 성전에 우상이나 그림을 새기는 것이 금기사항이라 꾸란 구절을 새겨넣는다. 꾸란은 마호메트 사후(632) 제3대 칼리프 우스만 이븐 아판(644~656 재위) 때 흩어진 구절을 모아 비단과 파피루스에 재 수록하여 만든 것이다. 배열은 그가 받은 계시 순이 아니며 제1장을 제외하고 가장 긴 장에서 짧은 장의 순이다. 꾸란은 아랍어 문헌 중 가장 오래됐고 영향이 지대하다.

이슬람법은 알라의 계명으로 교도들이 지켜야 할 의무체계이다. 이를 ‘샤리아’라 하는데 '물 마시는 곳으로 이끄는 길'이란 의미다. 샤리아는 9세기말 이슬람 법학자들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꾸란은 총 114장 중 단지 80여 장만이 관습과 규율을 명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포괄적인 법률체계가 아니다. 하디스는 무함마드의 말과 관행을 기록한 것으로 꾸란에 버금가며 이슬람 역사에서 이슬람의 양상과 기풍을 이해하는 지침이 된다.

이슬람의 역사를 보면, 아브라함이 쫓겨난 이스마일과 함께 메카의 카바 신전을 건축했다. 메카의 지배계급은 5세기 말 정착한 쿠라이시족으로 그 중 하심가(Hashim) 압둘 무딸립의 아들 열명 중 막내가 압둘라였다. 압둘라는 무함마드를 낳았는데, 태어나기 전 압둘라가 죽고 어머니 아미나도 메디나 방문 후 귀향길에 죽었다. 무함마드는 압둘 무딸립 집에 왔고 할아버지 사후 삼촌 아부 딸립이 양육했다. 빈곤한 삼촌은 식솔도 많아 그는 12세에 삼촌을 따라 시리아로 간다. 그때 일신론 사상이 아라비아 반도에 있었으나 시리아는 다신교를 믿었고 카바 신전에는 360개 우상들이 있었다. 그는 삼촌 때문에 좋은 직업을 찾아야했고 부자 과부 카디자에 고용되어 그녀 대신 시리아로 대상 무역을 떠난다. 그는 큰 성공을 거두고 시리아 지방 특산품을 구해 메카로 돌아왔다. 카디자는 그에게 청혼해 25세 무함마드는40세 카디자와 결혼했다. 결혼으로 그는 부와 명예를 얻었고 삼촌을 돕고자 알리를 입양했다. 경제적인 부로 그는 금식과 사색으로 진리를 찾았다. 어느날 그는 히라산 동굴에서 첫 계시를 받고 겁에 질려 집으로 왔다. 카디자는 기독교인 삼촌 와라까 븐 나우팔을 찾아갔고 와라까는 그가 만난 것이 하느님의 예언자 천사 가브리엘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삼촌 말을 전해주자 그는 예언자직을 인정하고 최초의 무슬림이 된다. 첫 계시 후 그의 양자들과 노예, 친한 친구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3년째 그는 친구와 친족들에게 단일신 알라에 대한 믿음을 선포했지만 그들은 그를 비난하며 무시했다. 하지만 그가 메카 순례객들에게 단일신 사상을 설파하자 카바 신전을 지키며 순례객들에게 수입을 얻던 부족원들이 그를 박해했다.

A.D 619년 부인과 삼촌 아부 딸립이 죽었다. 그와 신도들은 박해를 피해 622년 메디나로 갔는데 이것을 ‘헤지라’라 한다. 그는 자신의 말이 멈춘 수하일의 과수원 땅에 최초의 사원과 집을 지었다. 그리고 메카를 향해 하루에 다섯 번씩 ‘알라는 위대하다’고 암송하며 절했다. 그는 메디나에서 선지자 권위를 확립하고 부족의 통일을 위해 종교와 세속 구별이 없는 제정일치 사회를 추구했다. 628년 그는 카바 신전 순례를 결정했고, 2년 후 630년 1만명 무슬림은 무기없이 메카에 무혈 입성했다. 입성한 그는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쳤고 무슬림들도 외쳤다. 그는 카바 신전 우상들을 부수고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공포했고 메카 모든 집의 우상들도 다 파괴됐다.

632년 그는 카바 신전을 참배하고 메디나로 돌아오던 중 열병으로 죽었다. 657년 칼리파 우스만이 살해되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알리)가 뒤를 이었다. 우스만의 6촌 다마스쿠스 총독 무아위야 1세는 알리가 우스만의 복수에 소극적이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알리 지지자들은 갈라졌고 주전파는 계속 싸우자며 알리 진영을 떠났다. 이들이 최초의 종파 카와리즈파(Khawarij: 탈퇴자)로 661년 알리를 살해했다. 그 후 이슬람의 전파는 계속되어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북아프리카 대서양 연안, 711년부터는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했고, 중앙 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지배력이 미쳤다. 921년 이후 볼가강 중류의 불가르족이, 960년 이래 톈산 산맥 남북로의 투르크족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아랍인, 이란인 중심의 이슬람 세계는 투르크가 패권을 잡았고 10세기 말부터 확고한 기반에 섰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을 격파하며 서아시아의 이슬람화,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11세기 말~13세기 말의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

12~13세기 신비주의자 수피들은 현지인과 접촉하며 지역의 관행과도 적당히 타협했다. 셀주크 제국 다음의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로 진출해 1453년 비잔티움 제국(330-1453)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진출한 무슬림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 선교하여 15~16세기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했다. 동 아프리카에는 740년부터 이슬람이 퍼져 1010년경 나이저 강변의 서 수단 지방의 흑인 왕국에까지 세력이 미쳤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1492년 무어인의 최후 거점 그라나다가 함락되며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했다. 현재 이슬람 세계는 중동과 터키, 중앙아시아, 신장 위구르, 북아프리카, 러시아 남부, 카프카스, 인도,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등이다. 이슬람 국가의 이민들이 많은 영국, 프랑스 등 유럽에도 존재하며, 프랑스와 스페인은 이슬람이 제2의 종교다. 미국, 브라질, 파푸아뉴기니에 이슬람이 드물게 존재하고 한국도 약 20만 명의 무슬림이 존재한다 추정한다. 현재의 무슬림 수는 부정확하나 세계 약 25%인 12억명 내외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에는 교리가 상반되는 200여 종파가 있다. 대표 종파는 전체 무슬림의 80% 이상인 수니파와 이란이 대표하는 10-20%의 시아파다. 종파를 보면, 우스만의 살해로 다마스쿠스 총독 무아위야 1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알리 지지자 중 주전파는 알리 진영을 떠났는데 이들이 최초의 종파 카와리즈파(Khawarij/ Kharijites: 탈퇴자)다. 이들은 지하드(jihad, 성전)를 여섯 번째 ‘신앙의 기둥’으로 삼았고, 쿠라이시족 자손만 칼리파가 된다는 수니파에 반대하고,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베르베르 지역, 탄자니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에 조금 남아있다.

수니파는 통치권이 알리 후손에게만 있다는 시아파와 노예에게도 줄 수 있다는 카와리즈파의 중간적 입장이다. 부당한 통치자에 대한 반란을 주장하는 시아파의 견해와 달리 수니파 통치자는 일정한 자격을 구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여 사소한 과오로 통치자의 지위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수니파(Sunni)는 무슬림 공동체의 ‘순나(sunnah, 관행)’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순나’는 꾸란, 하디스, 예언자와 정통 칼리파의 선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아파(Shia)의 ‘시아’는 '시아 알리(Shia Ali,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에서 나온 말로 칼리파 자리를 알리 가문에 반환하려는 운동으로 시작됐다. 시아파는 우마이아 왕조의 창시자 무아위아 1세가 알리와 파띠마의 장남 하산을 살해했다 주장한다. 하산의 동생 후세인은 680년 이라크 카르발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살해됐다. 카르발라와 인접한 나자프의 이맘 알리, 이맘 후세인 사원은 시아파 최대 순례지다. 시아파는 초기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신봉하며 시작했으나 훗날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수니파와 신학적으로도 갈라섰다. 이들 양파 차이 중 하나는 ‘이맘(지도자/ 인도자)’에 대한 견해이다. 수니파의 이맘은 꾸란을 독경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시아파 이맘은 알리와 후세인의 후계자, 꾸란의 신비를 밝혀주어 신도들을 빛과 은총으로 이끄는 사람으로 격상됐다.

알리 이후 마지막 12대 이맘이 873년 사라졌다고 믿는 열두 이맘파는 사라진 12대 이맘이 구세주(마흐디)로 나타난다고 믿는다. 시아파의 85%인 열두 이맘파는 이란과 이라크 인구가 대부분이다. 아라비아 반도와 레바논, 파키스탄, 인도 등지에 소수가 있다.

자이드파(Zaidiyyah)는 후세인의 손자 자이드(Zayd)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열두 이맘 중 후세인 아들인 4대 이맘까지만 인정하고 여기에 자이드를 포함시켜 다섯 이맘파라고도 불린다. 자이드파는 알리 이후의 수니파 칼리파들을 인정치 않는다는 점을 빼면 교리상 수니파와 동일하다. 예멘 지역에 많다.

시아파인 이스마일파(Ismailism) 즉 일곱 이맘파는 열두 이맘파의 7대 이맘 무사 알카딤(745-799) 대신 6대 이맘 자아르 알사디크(702-765)의 장남 이스마일(721-755)을 추종한다.

와하브파(Wahhabis)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메카와 메디나)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지배하는 수니파 중에서도 순수파, 혹은 보수파에 해당한다. 

하쉬샤신파(Hashshashin, 암살단파)는 이란계 하산 이븐 알 사바흐가 1090년 말 이란과 시리아 산악지대에 요새를 만들면서 알려졌다. 마약인 해시시에 중독돼 암살을 해서 아사신이란 이름이 붇었는데, 영어 assassination의 어원이다. 이들은 수니파 지도층을 살해, '숨은 이맘'의 통치 체제를 전 이슬람권에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13세기 내분으로 약화됐고, 몽고군에 의해 섬멸됐다. 시리아의 분파도 이집트, 시리아에서 득세한 맘루크 왕조에 의해 제거됐다.

알라위파(Alawis)는 시아파의 알리 숭배를 신격화했는데, 창시자인 무함마드 이븐 누사이르의 이름을 따 "누사이리파"라고도 한다. 내세의 보상은 없고 지상의 행위가 어땠느냐에 따라 다음 생에서 지상에서의 환생 결과가 정해진다 믿는다. 이들은 시리아 인구의 11% 정도지만, 하페즈 알아사드 전대통령과 그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 현 대통령이 이 종파인 덕에 집권했다.  

드루즈파(Druze)는 11세기 이스마일파의 다라지(Darazi)가 숨은 이맘 '마흐디'를 자처하면서 창시했다. 비밀 조직으로 금요일 대신 목요일에 모이고, 일부일체제를 고수하며 '알리는 신의 화신이다'라는 것 등 독특한 신앙과 자신들의 경전을 가지고 있다. 시리아와 레바논에 주로 분포한다. 이슬람과 달리 칼리파 하킴이 신의 현신이라 주장하며 일신론을 믿는다.

19세기 중반 이란에서 나타난 바비파(Bábism)는 아랍어로 '밥(문)'에서 나왔는데 이는 진리의 문을 뜻한다. 바비파는 구약성경, 조로아스터교, 유교, 불교 등의 예언자들을 모두 인정했다.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은 철학, 사상에 가깝다. 서구에도 영향을 미친 수피즘은 금욕적인 자기수양을 추구한다. 수피주의자들은 춤과 노래로 신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 ‘수피’는 아랍어 'suf(양털)'에서 유래했고 초기 수도자들이 양털 옷을 입고 다녀서 나왔다. 이슬람 문학에 끼친 이들의 가장 큰 공헌은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어로 지어진 매력적인 서정시이다.

아랍의 최고 종교 ‘이슬람/ 이슬람교(Islam)’는 어디에서 유래가 되었을까?

‘Islam’은 아랍어 세자음어 어근 ‘s-l-m’에서 명사 ‘asalama(복종, 순종)’가 파생했고 이 단어가 동사적 명사 ‘al-islām(신에 대한 순종, 복종)’이 되었는데 무함마드가 만든 말이라고 한다. 이 말에서 ‘Islam’이 나왔는데. 영어에서는 1610년경 차용하여 최종 정착을 했다. 중국에서 이슬람을 회회교라고 지칭해서 회교(回敎) 명칭이 유래했다. 간혹 마호메트교라고 부르나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믿는 종교가 아니며, 알라가 유일신이다.

[김권제 칼럼니스트]
고려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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